강아지가 우리 집에 전해 준 기적
차가운 집에서 자란 나는
우리 집은 너무 차디찬 곳이었다. 우리 집 사람들은 모두 개인주의였다. 물론 이 집구석이 싫으면 집을 나갔어야 했지만 나는 우리 집이 서울 한복판에 있고 교통이 좋은 깨끗한 상태를 포기할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고생이다. 아니 나는 우리 집을 너무 싫어했다. 하지만 어릴 때 집을 탈출하려고 자취를 했을 때 나는 무너졌다. 나는 너무 우울했고 모두가 그리워졌다. 쓸모없다고 생각한 우리 가족까지도. 그리고 나는 자취 중 암에 걸린 것을 발견했다. 나는 패잔병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가족은 서로 짜증이 많은 상태였다. 모두 고집이 썼다. 외부 사람들에게 이상하다고 취급을 받는 나조차도 그렇지 않게 만들 정도의 사람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나는 나를 무한으로 의심하지만 그들은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았다. 나는 집구석에서 고통을 받았는데 우리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기 일상을 살아갔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뭔가 방해하거나 억압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걸 과하게 느꼈다. 그들이 나를 엄청나게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답답했다. 이곳에서 내가 편치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사는 게 합리적이니까. 실용적이니까. 그런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암까지 걸렸으니 내가 원룸에서 사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요양을 하기엔 그래도 가족이었다.
마지못해 보낸 가족과의 시간, 강아지가 오다
나는 가족들과 마지못해서 살면서 그들과 오히려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슬픈 과정이었다. 또한 나를 잃어가는 일이었다. 나는 어린아이로 남아있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싶었던 어른 아이였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지내면서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을 수 있었다. 그들과 지내는 것이 지루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지만 나는 그들과 남들보다 오랜 시간을 드디어 보내면서 나의 내면이 치료되고 있는 거 같기도했다.
그러다가 강아지가 왔다. 강아지는 갑자기 우리 집으로 왔다. 나는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다지도 작은 존재를.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 아이를. 이렇게 연약한 존재를 내가 키워낼 수 있을까. 나는 왜 그때 내가 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가족이 있었는데. 여전히 나는 이 강아지를 내가 보살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 강아지를 과하게 보살폈다. 모든 정신은 강아지에게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그 아이가 부서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 아이가 나에게 붙어있는 것이 마냥 편하지 않았다. 나는 불편하기까지 했다. 지루하기까지 했다. 강아지를 오랫동안 키우고 싶었는데 결국 키우는데 그 강아지의 사랑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나의 사랑을 발견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사랑을 원치 않은 게 아니지 않았을까. 강아지가 잠만 자는 게 짜증 나기도 했다. 나를 위해서 재롱을 부려줘. 나의 반응에 반응을 해줘. 하지만 강아지는 그렇지 않았다. 아기강아지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는 왜 다른 강아지 같지 않아?
그런 소름 돋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너무 놀랐다. 나는 그런 생각을 집어던지고 그저 강아지를 있는 그대로 보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 대하기로 했다. 내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형태는 모두 다른 것이니까.
강아지를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강아지와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녀야 하니까 운전면허를 따고 운전할 생각이 없었지만 억지로 운전 강습을 했다. 물론 여전히 운전은 못하지만. 그리고 강아지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애견카페도 데리고 다녔다. 거기서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강아지는 우리 집에 온기를 주었다. 모두가 정서가 안정되었다. 이 작은 존재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는 것이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이 존재가 옆에 누워있다는 것이 평화를 주었다. 이 존재가 그저 놀아달라고 끙끙거릴 때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강박증이 심한 사람이었다. 손을 매번 씻어야 하고 얼굴에 손을 닿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강아지가 오줌을 할인 혀로 뽀뽀를 해도 더럽다는 생각이 안 들고 행복해졌다. 위생에 덜 민감해졌다. 덜 까다로워졌다. 그게 싫기도 하지만 그게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거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조울증 치료에 발돋움을 해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었다. 밖에 가서 걷기 조차 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그건 조울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아지 덕분에 억지로 매일 산책을 시켰다. 그리고 계절의 변함을 날씨의 다채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나에게 활력을 주었다. 사람은, 특히나 조울증 환자는 밖에 나가야 했던 것이다.
강아지는 나에게 또 하나 용기를 주었다. 나는 강아지와 산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런 경험은 나에게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용기를 주었다. 나는 작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강아지가 나를 키워줬다.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는 모든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작은 강아지 큰 강아지 고양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 느껴졌다. 그저 길가는 사람 1이었던 나는 비로소 그들의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강아지는 아직 내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