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4층 복도에서

자매의 도시

by Yun

주현은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궁금했다. 궁금하지 않았는데 궁금했다.

결론적으로는 언니를 따라서 건물에 들어왔다. 망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서현의 마지막 말을 뿌리칠 수가 없었고 아니라고 둘러댈 만한 어떠한 마음과 핑계도 그 순간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주현은 공항에서 언니가 파혼자에게 약혼반지를 돌려주겠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언니를 서울까지 날아오게 한 그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 궁금했다. 언니를 이렇게까지 다이나믹하게 만들다니. 서현이 다이나믹하고 예측할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건 평생 겪으면서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녀에게서 나온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그녀를 그렇게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나 느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할 만큼 서현이 누군가와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건 관계가 있을 때, 깊을 때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언니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언니가 숨긴 적도 없었지만, 자신이 궁금해한 적도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변에 있는 자매들을 보면 서로의 친한 친구, 깊은 관계에 있는 타인에 대해 적어도 정보를 갖고 있었는데 주현은 자신과 언니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 걸까. 아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그 정도의 정보들은 갖고 있다. 자신들은 보통 자매들과는 달랐고, 특이했고 그건 다 서현의 탓이라고 주현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런 자신의 언니한테서 남자 이야기가 나왔고, 심지어 약혼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주현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가 아니라 다른 관계의 사람이었다면 극구 만류하고 도망갔을 것이다. 근데 주현은 도망은커녕 유혹이 되었고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주현은 이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고 그 사람을 만나면 자기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언니가 무슨 돌발 행동을 했을 때 뜯어말려야 하나, 근데 한 편으론 언니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그 사람이 너무 나쁘게 해서일 수도 있는데 그럼 언니를 말려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모르겠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지. 물론 이 상황과 이렇게 가고 있는 거 자체가 객관적으로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14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서현은 망설임 하나 없이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복도에 그녀의 구두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지는 거 같았다. 주현은 에코백을 꼭 쥐고는, 꼭 쥔 것처럼 보일까 봐 괜히 의식하면서 서현과 세 걸음 차이 뒤로 서현을 쫓아갔다. 복도를 돌아서 걷다 보니 한 집이 이사 중이었다. 주현은 그 집이 그 남자의 집이길 바랐다. 아니, 바라지 않았다. 그 남자 집이 아니길 바라는 순간에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이 사람을 여기서 만나야만 이 일이 끝나,라고 생각했다. 1408호. 주현은 자신이 지나고 있는 집의 호수를 확인하고 걸 어가면서 이사하는 집이 몇 호일지 짐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집 앞에 멈추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제발 그 남자가 이사하는 중이어라. 아, 아니야, 이미 이사 갔고 새입자가 들어오는 중이길! 걸음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주현의 마음이 왔다 갔다 계속 바뀌었다.

정답은 새입자였다. 자기 또래의 여자가 목장갑을 끼고 작은 박스들을 집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주현은 서현을 쳐다봤다. 얼굴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예상한 거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용기도, 그리고 그만큼의 가치도 사실 없었다.

주현과 서현이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걸 보자 여자는 짐을 옮기다 말고 당황스러운 얼굴과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주현은 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 괜히 미안했다. 언니가 말을 시작하면 더 당황스러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것을 원치 않았다. 주현은 언니가 말을 하기 전에 핸드폰을 꺼내서 아까 서현이 줬던 주소를 찾았다. 그리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여기 살던 사람이어서요. 혹시 이 주소가 맞나요?"


여자는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고 주현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몸은 현관에 두고 목을 쭉 빼면서 핸드폰에 적혀 있는 주소를 확인했다. 여자가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네, 주소는 맞아요."

"여기 살던 사람 혹시 언제 이사 갔는지 아나요?"


질문한 건 서현이었다. 서현은 주현보다 한 발 앞으로 나가면서 여자에게 말했다. 주현은 언니가 이렇게 자기 보다 앞으로 몸이 나온 것이 부담스러웠다. 이 사람도 부담스럽겠지. 여자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두 사람을 대했다.


"아, 저도 삼촌 지인이 살던 곳을 소개받은 거라 전에 계시던 분은 잘 몰라요. 언제 이사 갔는지는 정확히는 모르는데 집이 빈 지는 일주일 정도 되었어요."

"전에 살던 사람이 삼촌 지인이에요?"


서현이 불쑥 더 앞으로 나가면서 말하는 것 같았다. 주현은 순간 움찔했다. 여자도 순간 움찔하는 거 같았다. 주현의 느낌이었을까? 아니다, 느낌이 아니라 확신이다. 더 앞으로 나가지 않게 막아야 한다.


"네, 외국계 변호사님이라고 듣긴 했는데 삼촌도 잘 아시는 분은 아니라고 했어요."


여자는 친절했다. 뭐하는 거냐고 막 그럴 수 있었을 텐데 하나하나 조근조근 나름 당황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려는 거 같았다. 그런 여자의 태도에 주현은 더 미안했다. 자기 또래라고 생각했는데 행동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든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자기보다는 좀 더 성숙한 거 같았다. 주현은 이 사람이 더 난감해하지 않게 그리고 여기서는 알 수 있는 것이 다 끝났기 때문에 상황을 종료시키고 언니를 데리고 나가야겠다 생각했다. 언니가 먼저 말하기 전에 자기가 말을 꺼내야겠다.


"알겠습니다. 실례 많았ㅅ-"

"혹시 집 좀 구경해도 될까요?"


주현의 말을 끊고 서현이 튀어나왔다. 주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 거지?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그리고 정말 자신은 실례가 많았고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서 상대방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마음과 말과 행동을 막고 서현이 앞에 있는 이 친절한 여자분에게 꺼낸 질문은 진짜 잘 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너무나 무례했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집을 구경하겠다고? 제정신인가?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거지? 왜? 도대체 왜? 어떻게 해야 저런 생각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거지? 나는 어떻게 이 사람이랑 같은 배에서 태어난 자매일까?

앞에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니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나도 저 얼굴이랑 비슷하겠지? 이런 상황이 지겹다는 느낌도 같이 배어 있겠지만, 아무튼, 이사 중이 던 친절한 여자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백 번 이해가 됐다. 이런 상황에 놓인 자신이 화가 났다. 엄마한테 당장 전화해서 따지고 싶었다. 언니가 왜 오려는 것인지 확인은 했었냐고, 부모가 자식을 책임져야지 동생이 언니를 책임져야 하냐고, 언니를 좀 언니다운 사람으로 낳아주지 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고 있었지만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여기서 화까지 내면 저 사람은 더 곤란해질 것이다.


"아… 보시다시피 지금 이사 중이라 정신이 없어서요."

"잠깐이면 돼요. 그 사람이 한국에서는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궁금해서 그래요."


잠깐이면 된다고 하면서 몸을 앞으로 더 움직이는 서현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이 신나 보이는 미소가 아주 옅게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주현은 생각했다. 그냥 착각이겠지, 내가 지금 언니를 뭔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설마 헤어진 옛 연인의 집을 구경하는 게 신난 그런 마음은 아니겠지. 이제 친절한 여자의 얼굴은 완전 일그러졌다. 앞으로 그녀에게서 친절한 표정과 목소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주현은 익숙했다. 언니랑 있을 때면 자주 이런 일이 있었다. 친절한 사람들일수록 더 빠르고 급격하게 표정과 말투가 변했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서현이 무례했고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주현은 서현의 가방을 꽉 잡았다. 사실 팔을 잡고 싶었는데 다급하게 잡다 보니 가방을 잡게 되었다. 명품 들고 다니는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지금, 언니 그만해야 해. 주현은 마음을 다해 서현의 가방을 꽉 붙들었다. 팔을 잡았어야 했는 데 진짜...

서현은 주현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주현은 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주현은 서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우리 가야 돼. 서현은 주현의 눈을 3초 정도 쳐다보더니 여자를 쳐다봤다. 뭔가 생각하는 거 같더니 뒤로 물러섰다. 됐다, 더 나빠지진 않을 거야.

여기서 더 최악이 될 수도 없겠지만.


"이사 중이신데· 곤란하시겠죠? 실례 많았습니다. 이사 잘하시고요."


서현은 여자에게 말했다. 곤란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언니도 곤란이라는 걸 아는구나. 상대방이 곤란할 거라는 것도 생각을 하는구나. 예상외였지만, 근데 아는데 저런다고?라는 생각도 스쳤다. 아무튼 이 상황을 빨리 수습해야 한다. 주현은 고개 숙여서 인사했다.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최대한의 미안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까는 서현을 따라갔는데 이번엔 주현이 앞장섰다. 주현은 뒤돌아 보지는 않았지만 서현이 자신을 잘 따라오고 있나 걸어오고 있나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스쳐가는 복도의 현관문들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조금씩 마음에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빨리 나가자. 근데 그때,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친절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주현은 뒤로 돌아보았다. 서현도 뒤돌았다. 여자는 흰색 쇼핑백을 들고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이사하다가 발견한 건데, 이게 집에 있더라고요. 확인해서 보니까 썬캐처던데, 그 변호사님이 놓고 가신 건가 해서..."


썬캐처라는 반응에 서현이 반응했다. 주현은 그렇게 느꼈다. 여자는 쇼핑백 안에서 기다란 박스를 살짝 꺼냈다. 박스를 보자마자 서현의 큰 눈은 좀 더 커졌고 서현은 바로 그 상자로 손을 뻗었다. 저 썬캐처에 운명이라도 느낀 걸까. 흡수하듯이 너무 자연스럽게 썬캐처 박스를 받았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박스를 열었다, 원래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박스를 열자 주현의 위치에서는 자세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보라색 계열의 유리와 자개가 섞인 썬캐처가 보였다. 썬캐처로 인해 반사되는 빛이 서현의 얼굴에 비쳐서 아른거렸다. 서현은 진지해 보였다. 아까 남의 집 좀 구경하겠다고 들어가겠다고 하던 막무가내이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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