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화하는 트로트 팬덤, 꺼지지 않는 불꽃
약 2년여의 코로나 장기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이적의 노래 ‘당연한 것들’의 가사처럼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방구석 1열 방방콘과 같은 VR,메타버스와 같은 기술이 도입된 첨단 언택트 공연 콘텐츠 시장이 성장했지만 대중문화 예술공연의 특성상 뮤지션과의 면대면 공연은 단언컨대 비대면에서는 느끼기 힘든 희열과 카타르시스가 존재한다. 다행히 대면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은 회복되었고 코로나 시국이 파생시킨 음악 콘텐츠의 부상은 중장년층을 사로잡은 방구석 트로트 팬덤층을 탄생시켰다. 음원을 소비하는 MZ세대와 달리 음악을 소장하는 아날로그 실버 팬덤은 그동안 먹고 사느라 바빠서 잊고 지낸 그 시절 추억을 소환하며 기꺼이 중장년 층의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고 힐링하는데 있어 음악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이런 강력한 팬덤의 부상을 감지한 공연계에서는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자 발빠르게 ‘드림 콘서트-트롯’을 기획했다. K-POP 부흥을 함께한 28년 역사의 드림 콘서트 성인가요 버전이 생긴 것이다. 트로트 가수로만 무대를 채운 드림 콘서트가 열리고 국내 트로트 팬덤의 최상위에 등극한 임영웅, 영탁, 김호중의 팬덤은 연일 새로운 기록을 경신하며 중장년층의 팬덤문화를 만들어내며 네오 패밀리즘(신가족주의) 팬덤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지난 6월 26일. 지난 몇 년 동안 한산했던 부산 영화의 전당 야외 공연장 4,000석은 발 디딜틈 없는 공연 인파로 꽉 들어찼다. 80세가 훌쩍 넘은 백발의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가 김호중과 함께 ‘그리운 금강산’과 ‘마이웨이’를 열창하자 무대에서 엄청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대중음악 트로트와 성악의 콜라보레이션. 김호중은 6월 소집해제와 더불어 세계적 클래식 거장들과 성공적인 복귀 무대를 보여준 뒤 이루마, 안드레아 보첼리와 협연을 지속하며 바쁜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김호중 소속사는 기존의 트로트 가수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로 트로트 팬덤 서비스를 강화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데 스타웨이 김호중이라는 모바일 게임을 곧 출시한다. 게임 콘텐츠의 주인공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적 팬덤 파워를 체감할 수 있다. 13만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김호중 팬덤은 중년 남성팬들이 많다는 점, 부부팬, 클래식 팬들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TV 조선이 론칭하는 새로운 트로트 프로그램 출연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있으며 27일 두 번째 클래식 정규앨범 Panorama의 발매를 앞두고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58세대 팬덤층의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다.
트로트 열풍을 주도한 <미스터 트롯> 멤버 중 최근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영탁은 7월4일 17년만의 첫 정규앨범 타이틀곡 ‘신사답게’로 컴백했다. 앨범 발매 일주일 뒤 집계되는 한터차트 초동판매 기록은 52만 4천장. 대한민국 솔로 가수 5위이자 단일 앨범으로는 41위, 트로트 가수 중에서는 지난 5월 컴백한 임영웅과 53만장의 기록을 갖고 있는 김호중에 이어 역대 3위의 수치다.
아이돌 그룹도 넘기 힘들다는 더블 플래티넘 50만장의 기록. 그런가 하면 영탁의 전국투어 ‘탁쇼(Tak Show)’는 서울-인천-대구 공연 오픈 즉시 매진행렬 중이다. 5만7천여명의 팬클럽 회원 수와 47만명이라는 유튜브 채널 구독자수. 방탄소년단, 세븐틴, NCT, 에스파, 슈퍼주니어 등 아이돌 그룹 컴백에 밀리지 않는 놀라운 음반판매량과 티켓파워를 보여준 영탁은 지난해 여러 힘든 일을 겪었던 그의 복귀를 기다리고 지지해준 30~50대 여성 팬덤의 변함없는 충성도를 보여준다.
영탁의 팬클럽 중 기부문화에 힘써 온 산탁클로스는 컴백과 정규앨범 발매 축하 이벤트를 기획했다. 바로 전국의 청년예술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꿈을 지원하는 커버송&댄스 챌린지 프로젝트다. 2005년 데뷔한 후 17년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싱글 앨범과 음원을 발표하며 가수의 길을 걸어온 영탁처럼 뮤지션을 꿈꾸는 예술인들의 음악 활동을 지원하기로 결심한 팬들은 전국의 뮤지션, 댄서, 공연예술인들에게 6,000장의 영탁앨범 증정 뒤 총상금 1,500만원을 내걸고 이번 정규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커버 댄스, 커버 송 창작 대회를 개최했다. 7월 25일까지 접수 중인 챌린응모 영상들을 보면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틱톡과 유튜브를 통해 숏폼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즐기는 트로트 밈(Meme)세대의 확산과 이를 향유하는크리에이티브 유저 팬덤 4.0세대의 트렌드를 체감할 수 있다.
영탁 팬클럽 산탁클로스가 주최,주관하는 영탁 커버송 &댄스 챌린지
이러한 중장년층 팬덤의 폭발적 성장을 배경으로 기획된 프로그램 KBS 예능프로그램<주접이 풍년>에서는 영탁의 팬들이 기부 ·조성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탄생한 광나루 한강공원의 영탁 숲을 소개하기도 했다. 스타가 보여주는 선한 영향력을 팬들도 이어받아 자기만족으로 끝나는 고가의 선물과 조공문화를 지양하고 스타의 의지를 이어받는 선행의 선순환. 뿐만 아니라 영탁의 고향인 안동의 한 폐교 공간에 들어선 영탁 하우스 캠프는 영탁의 팬들이 직접 폐교를 임대하고 공간을 꾸며서 방문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홍보하는 공간 전시문화콘텐츠로 스토리텔링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동시 녹전면 폐교를 임대해 팬들이 직접 꾸민 영탁 하우스 캠프/캠프 내부/팬들이 기부조성한 영탁숲 (출처: 오구와 탁 트위터)
이렇듯 스타의 이름을 딴 숲과 공간이 만들어지고 한 트로트 가수의 컴백을 응원하는 팬들은 그의 음악적 영향력이 대중들에게 확산되기를 바라며 아무 대가없이 자신의 시간과 애정, 경제적 자산을 자신이 애정하는 대상에게 아낌없이 투자한다. 이들이 단순히 과거 아이돌 팬덤에서 보여준 맹목적인 애정공세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문화인류학과 문화콘텐츠 산업적 차원에서 이를 분석한다면 중장년층 팬덤 문화는 다음과 같은 차별점을 갖는다.
바로 가족문화를 중요시하는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팬덤문화다. 한국인들은 밥은 먹었냐, 언제 밥 한번 먹자며 상대방의 안위를 걱정하는 정문화를 가지고 있다. 애정의 대상을 챙기고 배려하는 문화는 중장년층의 팬덤 문화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고가의 명품선물 대신 직접 담근 팔도의 김치나 음식을 택배로 보내주고 자신이 직접 만든 굿즈를 선물하거나 스타의 건강을 내 자식처럼 걱정하며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스타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중장년의 트로트 팬덤은 일시적이거나 충동적인 애정 표현이 아닌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한국의 장처럼 묵은지 사랑이다. 비록 이들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아이돌 팬처럼 바로 탈덕하는 대신 어미새처럼 지켜보며 둥지를 날아갈 때까지 스타의 성장을 응원한다. 이러한 중년여성 팬덤의 대다수가 혈연 대신 관계에 중심을 두는 신가족주의의 개념에서 팬덤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트로트 팬덤의 폭발적 성장의 배경에는 서양 문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을 기반으로 한 팬덤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이들은 오랜 시간 자신이 선택한 대상을 지켜주고 싶어한다.
산탁클로스의 연탄봉사 산탁클로스의 365일 쌀앙해 기부 행사
물론 이러한 중장년층 트로트 팬덤을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선택한 대국민 투표 시스템의 시청자 지분참여율이 ‘내가 뽑고 내가 만든 스타’라는 아이돌, K-POP 가수발굴 프로그램과 별 차별성이 없어지면서 아이돌 팬덤 응원방식이 트로트 팬덤으로 그대로 유입됐기 때문에 인기 트로트 팬덤의 경우도 과도한 투표 경쟁, 아이돌 팬덤의 응원 스케쥴인 생일, 데뷔일, 음반 발매 이벤트의 루트를 그대로 표방한다. 당연히 스타의 스케쥴을 따라다니는 사생팬도 생겨나고 응원 방식을 놓고 팬들간 반목과 갈등도 발생한다. 그러나 10,20대가 대부분이었던 아이돌 팬층에 비해 높은 연령층과 다양한 사회 경험을 가진 전문직종의 팬들로 많다 보니 대내외적인 갈등과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집단지성을 발휘해서 현명하게 잘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지혜롭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이 어쩌면 중장년층 팬덤의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내 스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며 현명한 선택을 하고 기부와 선행을 실천하는데 있어 더 유연하다는 것이다.
서로 연대하고 소통하며 양육의 팬덤을 넘어, 창작의 단계를 넘어, 팬과 스타는 하나의 역사를 같이 써내려간다. 팬덤 4.0시대로 접어든 중장년층의 팬덤은 마치 초로의 신사 머리 위에 내려앉은 하얀 눈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의 경륜을 보여주며 따스하게 서로를 품는다.
이렇게 지금 여기, 트로트 팬덤은 정이라는 한국적 정서로 단단하게 봉합되어 엄청난 응집력을 보이며 진화해나간다. 장성한 아들, 혹은 막내 동생 같은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아버지,엄마,누나 같은 따뜻한 한국적 팬덤의 정서는 앞으로 또 어떤 놀라운 역사를 써 내려갈까.
지금 대한민국 트로트 팬덤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다.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르면서 마주친 마지막 선물 같은 즐거움을 공유하며 팬과 스타가 동반 성장하는 그 불타는 연대기를 함께 써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