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랑 살림장만은 어떻게 했어? -2

<알> 살림 장만이라, 이 얼마나 설레는 문구인가!

by 뇽알

독립 기획 단계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며 지금까지도 소소하게 지속하는 행복 생성 행위라 감히 말하겠다. 크게는 책장, TV장, 소파 같은 가구부터 소박하게는 간장 종지까지, 우리의 살림은 자취 기준으로는 시작부터 스케일이 꽤 컸다.

소비패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필수 살림’의 개념에 대해서도 우리의 의견은 달랐는데, 뇽은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추고 시작해야 한다’라는 주의였고, 나는 ‘급한 거 먼저 사고 살면서 늘린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소 결제금액이 5만 원만 넘어가도 할부를 고민하는 나에게 모든 가구를 갖추고 시작하는 독립생활은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그래도 나의 고집 때문에 뇽이 불편해지는 건 원치 않아서 쿨한 척, 뇽의 살림 철학을 따르기로 했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지나간 결제내역을 돌아보지 않는 나, 거침없이 긁어보자!


우선 뇽의 큰 그림을 완성해놔야 내가 좋아하는 그릇들을 들일 수 있으므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이케아’로 가기로 했다. 이케아가 뭐라고, 가구 매장이 거기서 거기 아냐? 그냥 인터넷으로 사도 되는 거 아닌가, 싶었던 혼자만의 선입견을 현장에서 즉시 철회했다. 생각보다 쇼룸 구경이 너무 재미있었던 것.

내 머릿속에는 뇽처럼 사물을 3D로 올리는 시스템이 없어서 그 쇼룸을 우리 집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감은 전혀 오지 않았지만, 다 떠나서 잡지 사진을 실물로 보는 것 같은 즐거움이 있었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지 예쁜 것은 좋은 것.


KakaoTalk_20210505_154257669-1.jpg 내 집 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가구와 소품이 있다 보니 잘만 고르면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었다. 심지어 내 관심사인 접시나 티스푼 등도 꽤 있었으니까. 일단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소파침대, 책장, 책상, 식탁, TV장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건 제품 사진과 함께 사이즈 스펙을 함께 찍어두었다 - 이렇게 찍어놓으면 뇽이 집에 가서 신나게 도면을 만든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이런 일을 좋아해서 천만다행이다 -

소파침대 코너에서 초반에는 사람이 별로 몰리지 않았는데, 뇽이 소파 하단을 끌어당겨 침대를 만들자 갑자기 그 뒤로 체험 대기 줄이 길게 생겨났다. 하여간에 영업 참 잘한단 말이지. 2인용 소파여서 어지간히 작은 집에도 부담 없을 사이즈에, 펼쳤다가 접기도 어렵지 않았으나 색깔이 영 끌리지 않았다. 인조가죽은 너무 새까맸고, 마음에 드는 색깔을 찾았더니 패브릭이었다.

뇽은 음료를 자주 마시고 나는 심심찮게 과자를 먹는데, 패브릭 소파를 샀다가는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다른 가구 매장을 가든지 신상을 기다리든지 간에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우리는 화장품과 옷과 가방 취향은 그렇게 다르면서 희한하게 가구 취향은 정확히 일치했다. 나무색과 흰색에, 장식 없이 단순하면서 각진 형태로 굳이 유리나 천 커버를 따로 깔지 않고 나무 상판 그대로 쓰는 것. 그리고 식기도 민무늬에 메인은 흰색으로, 포인트로 컬러 식기 몇 개만 사자는 것에 조금의 이견도 없었다 - 음식 사진은 하얀 그릇에 담아놓고 찍어야 가장 예쁘다는 생각이다 -

다만 컵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주로 도자기 컵을 썼고, 아이스 음료를 좋아하는 데다 컵에도 결벽증이 발동하는 뇽은 유리컵을 선호해서 그냥 둘 다 사기로 했다. 일단 이케아 1차 방문에서 가구는 위시리스트에 넣어놓은 채, 내가 고른 접시 몇 개와 뇽이 집어 든 공구함 정도로 쇼핑을 마무리했다.


이후 어느 쇼핑몰을 가든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 샵만 보면 무조건 들어갔다. 소파침대도 삼고초려 끝에 지금의 반려를 만났으니, 비싸니까 그냥 구경이나 하자고 들어가 본 한샘 매장이었다. 3인용의 모래색 소파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리클라이너가 아닌 데다 애매한 3인용이라 그런지 아무도 앉지 않은 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뇽이 가까이 가서 요리조리 살피더니, 얘가 소파침대라며 얼른 펼쳐보았다. 이케아에서 본 것보다 사이즈도 훨씬 큰 데다 인조 가죽의 부드러운 질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당장 살 것도 아니면서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이후로도 한샘 매장을 지나칠 일만 있으면 얘를 만나러 굳이 들어갔다. 금이 - 우리 둘 모두와 친한 친구 -와 셋이서 매장 구경하자고 들어갔을 때는 마치 우리 집 소파인 것처럼 으스대며 보여준 적도 있었다 - 금은 한술 더 떠서 ‘음, 여기 내 자리도 있군.’ 하며 만족스러워했다. 과연 우리 친구답다 -

이렇게 마르고 닳도록 앉아놓고 정작 결제는 인터넷에서 해버린 배신자들이지만, 지금도 우리는 어쩌다 한샘 매장에 가면 그 소파가 있는지 없는지 유심히 살핀다.


그렇게 우리 살림 중에 가장 공을 들여 모셔와 놓고는 굴려도 이렇게 굴릴 수가 없다. 고작 3년 정도 썼는데 등받이 쿠션이 벌써 울고 있으니 말이다. 접이식 소파라는 것이 공간 활용을 위해 생겨난 것인데, 평일 아침에 이놈을 곱게 접어놓고 출근할 정도의 체력이 없어 일주일 중 5일은 침대 상태로 방치한 나머지 기능이 무색해졌다.

대신 등받이 높이 조절이 가능해서, 잘 때 역류성 식도염에 시달리는 뇽의 자리만 살짝 올려서 쓸 수 있다는 것과 퀸사이즈 온수 매트가 쏙 들어가는 사이즈가 너무 마음에 든다. 나중에 더 큰 집으로 이사하거나 혹은 소파가 우리의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명을 다한다면 다른 걸로 바꿔야 할 텐데, 벌써부터 이별할 생각을 하면 아쉬울 정도다.


나머지 큰 가구 - 책장, 책상, 식탁, TV장 - 는 처음 계획대로 이케아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이미 구입할 목록을 다 정해놨기 때문에 금방 사서 차에 싣고 편하게 올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녹록지않았다. 두 가지 변수가 있었으니, 하나는 미리 봐 뒀던 식탁이 사라진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철두철미한 뇽조차도 TV장의 부속품이 이렇게까지 세분화되어 있는지는 몰랐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우리의 식탁은 뇽이 직원을 붙들고 적극적으로 구매욕을 어필한 끝에 겨우 재고를 확보했고, TV장은 내가 혹시 몰라서 챙겨놨던 픽업 목록에 쓰여 있는 번호를 하나하나 육성으로 불러가며 창고를 빙빙 돌아 찾았다. 다른 그 무엇보다 부속품이 많았고, 부피도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인류 최후의 석탄을 캐러 가는 광부라도 된 양 비장한 얼굴로 앵글 안쪽에 기어들어가 몸만 한 TV장의 상판을 밖으로 밀어냈고, 뇽은 없는 근력을 끌어모아 끙끙대며 카트에 담았다. 둘이서 가져간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게 많은 짐이 쌓여가는 카트를 보고 행인들이 한 번씩 힐끔거렸는데, 아마도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겠지만 우리끼리는 마냥 뿌듯해했다.


이 부속품들을 실어 가려고 일부러 큰 차를 빌려서 왔건만, 완성된 우리의 카트를 보는 순간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차에 싣는 데 성공하더라도 주차장에서 집까지 한 번에 옮길 수가 없을 정도로 부피가 크고 무거웠다. 차량 렌트비와 제품 배송비를 이중으로 지불해야 할 상황에서, ‘기운 쓰지 말고 돈을 쓰자’, ‘내 관절이 최소 배송비보다는 비싸다’ 라는 공통된 신념을 가진 우리는 미련 없이 이케아 배송팀에 카트를 넘기고 나왔다.


20170910_124705-1.jpg 이걸 직접 들고 가겠다고?


그 외 필수 가전인 세탁기, 냉장고, 전기밥솥, 청소기는 뇽의 진두지휘 하에 하이마트 사전답사 후 인터넷 주문으로, 식기, 수저세트, 수건, 변기 솔, 각종 세제 등의 잔살림은 ‘모던하우스’, ‘노브랜드’, ‘버터’, ‘자주’, ‘다이소’ 등 브랜드를 가리지 않고 들르기만하면 사가지고 나왔다.


나는 독립하기 전부터도 그릇 욕심이 상당한 사람이어서, 내 맘대로 샀다가는 누워 잘 자리도 없어질 판이라 일단 고르고 나서 뇽의 결재를 받아 구입했다. 밥그릇, 국그릇은 손님용 포함 딱 네 개씩만 샀으면서 컵은 와인잔, 주스잔, 커피잔, 맥주잔, 물컵에 아이스크림 볼까지 갖추는 이상한 욕심을 부렸다.

특히 아이스크림 볼 4p 세트를 제일 먼저 사서는 독립하기 전 뇽의 방에서 몇 달을 묵혔는데, 막상 이사할 때가 되자 갑자기 뇽의 어머님께서 그동안 아껴왔던 거라며 새 아이스크림 볼 4p 세트를 협찬하시는 바람에, 졸지에 아이스크림 볼만 8개가 되었다 - 하지만 두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그 무엇도 남에게 기부하지 않은 욕심쟁이들 -


그래도 이런 그릇들은 부피가 꽤 크다보니 그 후로 아무리 예쁜 디자인이 나와도 보관할 자리가 없어 지름의 욕구를 참을 수 있었는데, 종지는 작아서 괜찮다면서 몇 개를 산 건지 모르겠다. 하얗고 둥근 종지, 하얗고 네모난 종지, 유리종지, 식빵 모양, 벚꽃 모양 종지에 급기야는 마블(MARVEL) 종지까지. 것도 한 번에 두 개씩 샀다. 사놓고 우리끼리도 어이가 없어서 하여간에 그릇이 종지만 한 인간들이라고 자조했는데, 의외로 종지가 쓸 데가 많다 -정말입니다. 다들 냉장고 한 번 열어보세요 -


IMG_0793-1.jpg 종지 파티를 벌여보자



수저받침은 처음엔 저렴한 나무 재질로 샀다가 양념물이 든 게 잘 빠지지 않아 세라믹으로 다시 샀고, 그나마도 완벽한 흰색이 아닌 게 마음에 차지 않아 나중에 민무늬 흰색을 발견하고 또 샀다. 수건은 저렴한 다섯 색깔 묶음 세트를 샀다가, 금방 망가지는 바람에 다음번 구입할 때는 돈을 좀 더 썼다. 그 밖에 욕실 발 매트도 심플한 무채색으로 두 장 샀다가, 고양이랑 토끼가 귀엽다고 두 장 더 사는 식으로 중복 구매를 꽤나 했다.

구경삼아 갔던 리빙 디자인 페어에서는 그동안 여행 기념품으로 사 모은 향초가 꽤 있는데도 향초를 두 개나 더 사고, 자주 쓸 것 같지 않은 오리 모양 요거트 스푼을 굳이 샀다. 이러니까 엄마들이 보시면 소꿉 살림이라고 놀리는 거지만, 아무렴 어때? 이러려고 독립하는 겁니다.


이 많은 살림 중 우리의 집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밥솥이었다. 우리 엄마는 손 없는 날을 중시하셔서, 내가 독립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유독 강조하셨기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 만큼은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식 이삿날을 손 없는 날로 맞춰서 정하기에는 이사업체 예약이나 연차 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고민하던 차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현자들이 많았다. 밥솥이 들어가야만 ‘오늘부터 1일’ 이라니, 다시 말해 손 없는 날 밥솥만 모셔가면 된다는 말씀. 이 정도면 해볼 만한 조건이어서 뇽과 함께 우리의 소중한 밥솥 ‘한 상궁’ - 모두가 생각하는 그 한 상궁 - 을 모시고 빈집에 들어왔다.

아마도 그 집에 귀신이 살고 있었다면 어이없어했겠지만 밥솥 제품 박스에 입주일을 굳이 적어놓고, 빈집 안을 돌아다니며 “우리는 오늘 입주했다!”라고 외친 후 뿌듯하게 집을 나섰다.


필수 가전도 이삿날 전 설치 완료되었고, 이삿날에는 각자의 집에서 방 하나씩 차지하고 있던 짐들을 용달에 실어 온 후 메인 인테리어인 이케아 가구 - 정확히는 부속품 - 들을 기다렸다.

보통 주문한 상품이 배송되면 빛의 속도로 택배 박스를 뜯어야 하는데, 이케아 배송 기사님이 거실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아 준 크고 작은 부품 상자들은 감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 이케아 가봤다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조립했다는 사람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내가 내 인생 최초의 가구 조립을 내 집에서 목격하겠구나. “아유 나는 안 볼란다”하고 돌아서고 싶었건만, 사람 부릴 줄 아는 뇽사장님은 조립을 못하면 나사라도 들고 오게 만들었다. 옆에서 달라는 나사를 집어주고, 드라이버 돌릴 때와 상판 뒤집을 때 같이 잡아주고 몇 번 하다보니 어느새 가구가 하나 나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나는 완성된 가구를 보는 건 좋아도 설명서를 연구하는 취미는 없어서, 뇽이 부를 때만 가서 시키는 일을 하고 곧장 부엌으로 돌아왔다.


싱크대에는 나만의 과제인 설거지가 산적해 있었는데, 내가 살다 살다 설거지 때문에 다리가 아팠던 건 처음일 정도로 그릇의 양이 엄청났다. 달랑 두 사람 살면서 이 많은 식기를 언제 쓴다고, 내가 정신이 나갔었던 게 틀림없다는 자책과 후회의 시간을 잠시 가졌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늘었다. 종지를 꾸준히 샀으며, 레드와인이 생각보다 안 먹히고 화이트 와인이 맛있다면서 샴페인 잔을 또 샀고, 얼마 전에는 콘치즈용이라며 작은 직사각형 접시를 또 샀다.

그리고 달랑 두 사람이 살면서 이 많은 식기를 꼬박꼬박 써먹었다. 손님이 오면 거의 풀세트를 꺼내놓고 쓰고, 우리끼리만 먹을 때도 특별 요리나 디저트 타임을 가질 때 마구마구 꺼낸다. 설거지를 두려워하는 뇽은 내가 접시를 꺼낼 때마다 슬슬 눈치를 보는데, 한 치 앞을 못 보는 나는 플레이팅에 눈이 멀어 접시고 컵이고 아낄 줄을 모른다. 아직 고생을 덜 한 게 틀림없다.


문제의 이케아 가구도 포기를 모르는 뇽님의 수고 덕에 우리 살림에 무사히 합류했다. 처음부터 가구를 다 살 필요가 있나,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가구를 다 들여놓고 보니 비로소 사람 사는 집 같았다. 특히 식탁이 생긴 것이 너무 좋았다. 임시로 바닥에 신문지를 깔거나 작은 밥상을 펴놓고 먹을 때는 반찬도 거의 꺼내지 않고 대충 퍼먹었는데, 널찍한 식탁이 생기니 뇽의 요리 욕구와 나의 플레이팅 욕구가 동시에 타올랐다.

냉장고도 왜 큰 걸 사야 하는지 살면서 점차 납득했다. 휴일만 되면 뇽이 선보이는 스페셜 요리를 위해서 기본 식재료가 상시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같은 디저트류를 독립하기 전보다 훨씬 자주 사는데다 배달 음식 몇 번만 시키면 냉동실이 꽉 찼다.

이삿짐 줄인다고 각자 집에서 책을 많이 들고 오지도 않았는데 두 개의 책장도 금방 다 채웠다. TV장은 단지 TV를 얹어놓기 위해서 사는 줄로만 알았건만 지금은 TV장 없는 안방이나 거실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크다. 기대 이상의 근사한 집을 완성하게 되어, 가구를 미리 사야 한다고 나를 꾸준히 설득했던 뇽에게 새삼 감사했다.




이삿짐 정리를 마치고, 몇 번의 주말을 보내며 새 집에 적응하다보니 어느덧 겨울이 다가왔다. 겨울이 다가온다는 건, 다시 말해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전부터 독립하게 된다면 꼭 이루고 싶었던 로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트리를 집에 놓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매년 겨울마다 집에 있는 큰 화분에 장식했었는데, 산타클로스의 고객 리스트에서 제외된 다음부터는 크리스마스 장식과도 함께 이별하게 되었다.

교회 안 다니고 착한 일도 안 하지만 반짝반짝한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캐럴이 울려 퍼지는 따뜻한 파티 분위기가 좋아서, 매년 12월마다 집에 트리가 없는 아쉬움을 카페나 대형 쇼핑몰을 찾아다니며 달랬다.

하지만 이제 매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냈던 뇽과 집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로망을 실현할 적기가 아니겠는가. 내가 트리 타령을 하자마자 뇽은 그동안 업무차 다녀왔던 고속터미널과 남대문 시장에서 봤던 엄청난 트리들과 소품에 대해 브리핑을 하며 나보다 더 큰 열의를 보였다. 흠, 생각보다 일이 커졌는데? 그렇게 ‘트리 구매’의 로망은 ‘트리 프로젝트’로 둔갑하더니 가구 마련 못지않은 사전 답사와 가격 견적으로 이어졌다.


먼저 남대문 시장부터 접수. 꽃 시장 조화 코너 안에 크리스마스트리와 소품 가게가 함께 있었다. 오늘의 메인은 트리지만 생전 처음 가본 꽃 시장의 규모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동안 꽃집에서 장미나 프리지아 정도만 사봤다면 여기서는 장미가 너무 흔하게 느껴질 만큼 다양한 꽃이 있는 데다, 가격도 저렴해서 지갑이 절로 열렸다.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 위기! 식탁을 장식할 파란 수국과 겨울 분위기 물씬 풍기는 목화까지 손에 넣은 뒤에야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왔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그 층에 있는 트리를 다 외울 만큼 돌아다니며 결정장애에 시달린 끝에 겨우 파스텔톤의 도토리 장식이 달린 앙증맞은 트리로 가닥을 잡고 가격을 물었다. 장식 포함 45,000원이라… 비주얼과 정성을 생각하면 그럴 만했지만, 시세를 잘 몰랐던 나는 비싸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속터미널에서 더 좋은 걸 보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결정을 못 하고 가게 이름만 메모한 채로 나왔다.


20171111_153701-1.jpg 환상의 나라, 11월의 꽃시장


다음 주로 이어진 고속터미널 답사에서는 꽃 시장과 트리 존을 각각 방문했다. 카테고리가 따로 있는 것만 봐도 남대문 시장보다 확실히 가게의 규모가 컸고, 트리들도 카페에서 써도 될 만큼 크고 화려했으나 그만큼 가격도 훨씬 더 비쌌다. 여기서는 5만 원 이하로 마음에 드는 트리를 찾기 힘들었다. 일 년에 한번을 위해 10만 원이 넘는 금액을 쾌척하자니 이사하면서 쌓인 할부 금액이 발목을 잡는 데다, 나의 ‘자잘하게 잦은’ 소비성향과도 맞지 않는 것 같아 몇 바퀴를 돌면서도 결정을 못 했다.

아무래도 지난주에 봤던 도토리 트리가 만만한 것 같은데 뇽에게 괜한 헛걸음을 시킨 것 같아 눈치를 보며 우물거리자, 뇽은 요만큼의 귀찮은 기색도 없이 나를 다시 남대문 시장으로 데려가 주었다. 살면서 나의 결정장애 때문에 뇽이 헛걸음을 한 건 이번만이 아니었는데, 한 번도 나무라는일 없이 앞장 서주었던 대인이시다. nn번째 헛걸음에 심심한 사과 및 감사를 표하고 다시 트리 이야기로 돌아가면,


“7만 원이요?”

그것 참 이상하다, 분명히 지난주에 45,000원으로 들었는데, 갑자기 가격이 그렇게 올랐을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트리를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분명 인근에 도토리 트리를 파는 데는 여기뿐이었다. 석연치 않았지만 고속터미널에서 너무 많은 기운을 뺀 나머지 오늘 아니면 트리를 영영 살 수 없을 것 같았고, 10만 원 넘는 걸 하도 많이 본터라 그 정도 금액에는 무덤덤해져서 그냥 주문하기로 했다.

트리 장식을 하는 동안 다른 가게를 보는 둥 마는 둥 감질나게 주변 구경을 하며 기다리다가, 얼추 약속한 시각이 되어 돌아왔는데 생각보다 많은 장식이 달려있었다.


“나 가격 너무 싸게 얘기했다고 혼났어. 9만원 짜린데.”

아까 주문을 받은 아주머니가 울상이 되어 하소연하셨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트리를 찬찬히 보니 꽤 많은 장식이 달려있기는 했다. 뭐 이렇게 가격이 계속 오르나 싶었지만 눈앞의 트리가 너무 예뻐서 무르기에는 또 아까웠다. 더군다나 평소라면 얘기가 달라진 것에 대해 한 마디할 뇽이 별말 없이 만원을 더 내미는 걸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 싶어, 8만 원으로 합의하고 트리를 모셔가기로 했다. 오, 생각보다 무겁구만.


“이거 우리가 봤던 것보다 훠얼씬 큰 거 같은데.”

시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뇽이 말하길, 우리가 주문할 때 나무를 잘못 보고 지난주에 봤던 것보다 훨씬 큰 걸 가리켰다는 것이다. 어쩐지 무겁더라니, 안고 가는데 앞에서 내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크기도 컸다. 이 큰 걸 장식으로 빼곡하게 채우고 조명을 둘렀으니 비쌀 만했는데, 아르바이트 아주머니는 우리가 계속 45,000원 타령을 하는 통에 견적을 잘못 낸 모양이다.

비록 처음 봤던 그 나무는 아니었지만, 생각보다도 장식을 너무 예쁘게 해주셔서 만족스러웠다. 시세에 비하면 합리적이되, 내 기준에서는 거금을 주고 구입한 우리 집의 첫 크리스마스트리. 나는 택시를 타고 가자는 뇽의 제안을 깔끔하게 거절하고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세상천지에 내 트리 - 검은 비닐봉지 속에 맨 꼭대기 별만 튀어나온 - 를 뽐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트리 조명을 켜고, 페루에서 데려온 야마 인형들을 앞에 세워보니, 이렇게 완벽해도 되나 싶게 아름다웠다.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11월부터 시작하여 1월에 마감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해마다 오너먼트를 하나씩 늘리고,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케이크를 자른다. 산타클로스의 고객 리스트에서 빠져버린줄 알았는데 VIP로 거듭난 기분이다.


20171118_182721-1.jpg


이렇게 성공적으로 살림을 장만하여 지금까지 깔끔하게 잘 쓰고 있다는 이야기로 글을 맺고 싶지만, 실패 사례도 있었던 것을 굳이 숨기지는 않겠다.


두 번째 이사 때는 없는 가구만 채워 넣자며 다시 쇼핑했는데 당시 회사에 치어 매장을 둘러볼 여유도, 돈도 없었던 나는 별 생각 없이 인터넷으로 주문하자고 제안했다. 마찬가지로 바빴던 뇽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나는 추가로 구매해야 하는 가구들을 대강 쇼핑 검색에서 사이즈와 색상 기준으로 정렬해서 조회했다. 인터넷에서 옷이나 화장품은 자주 샀지만 가구 쇼핑은 처음인 데다, 하나의 쇼핑몰에서 사이즈를 일일이 찾아 헤매는 것이 귀찮았던 나는 대충 비슷해 보이는 톤으로 아무 샵에서나 사이즈만 맞으면 주문해버렸다. 그 결과, 화장대 수납장과 화장대, 옷장, 코너장이 각각 다른 톤의 나무색으로 한 방에 들어가 버리는 참상이 펼쳐졌다 - 세상에 나무 톤이 이렇게나 다양한지 미처 몰랐다 -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꼴을 처음 봤을 때 크게 이질감을 못 느꼈으나, 뇽의 실망감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옷장과 코너 장의 톤이 맞지 않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구조상 바로 옆에 붙여도 될 옷장과 코너 장 사이에 굳이 행거를 설치하여 떨어뜨려 놓을 정도로 톤이 맞지 않는 것을 극혐했다. 나는 기왕에 사버린 거 나중에 바꾸기로 하고 대충 넘어가 주지, 하고 속으로 구시렁댔으나 이사 3일 차에 놀러 오신 뇽의 어머님이 같은 반응을 보이시는 걸 보고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옷이나 화장품은 실패해도 다시 사거나 버리기가 쉽지만, 가구는 한번 들이면 여간해서는 바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을. 왜 이렇게 경솔했을까, 에휴.


뇽은 비록 예상 밖의 가구 조합에 크게 상처를 받았으나, 그 방을 영영 등지는 대신 화장대에 손수 LED 조명을 설치하고 드라이기 거치대도 부착하는 등 실용적인 방으로 꾸미는 길을 택했다. 지금은 수납장과 색이 다른 화장대 위에 또 다른 나무 톤의 이케아 정리함까지 올라와 있다. 이 방의 색을 통일감 있게 갈아엎기에는 너무 많이 돌아와 버린 것. 뇽은 이제 해탈한 것 같지만 사실 지금은 내가 더 신경이 쓰인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이사 전까지 돈이나 열심히 벌어야겠다. 그땐 다시 매장으로 갈 것이다. 가고 만다 내가!



<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