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뇽>둘 중 계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관리하면 된다. 근데 그게 나
20대 초반부터 여행하면서 여행경비는 자연스럽게 내가 관리했다. 계획을 내가 짰으니 그게 마음이 편했을 뿐인데 알과, 함께 친한 다른 친구들은 내가 경비를 관리하는 것에 대해 ‘골치 아픈 일 덜었다’라며 즐거워하곤 했다. 그게 왜 골치 아픈 일이지? 내 여행의 추억을 정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 말을 알에게 했더니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며 매우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근데 내 말이 맞지 않나? 영수증들은 우리가 먹고, 사고, 쓴 것들에 대한 기록이고 이것들은 우리가 어딜 가서 뭘 먹고, 어떻게 사고, 무엇을 즐겼는지 증명하는 증명서나 다름없으니까. 알은 여행일기를 잘 쓰는 편인데 그것과 비슷한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지출내역 정리 및 통계 내는 일을 즐기는 편이다.
10대 시절 주말의 어느 날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놀이동산에 갔을 때, 각자의 자유이용권과 식비를 놓고 더치페이를 한다고 애를 먹었던 적이 있다. 각자 한 명씩 자유이용권을 사고, 각자 점심 값을 내고, 각자 간식을 사 먹고. 매우 투명하고 어쩌면 공평한 방법이겠지만 피로도는 훨씬 늘어난다. 가령 A가 추로스가 먹고 싶어서 샀는데 B와 반 정도 나눠 먹었다고 치면 A의 손해가 된다. 또는 B가 슬러쉬를 구매했는데 C가 거의 다 먹었다고 하면 B의 손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문화적 특성상 함께 놀면서 먹는 것을 셰어 하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어서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하는데,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친구끼리도 감정이 상하게 된다. 말로 하면 좋을 텐데 ‘먹는 것 가지고 그런다’, ‘쪼잔하다’는 얘기는 또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말도 못 하고. 사실 친구와 살면서 발생하는 많은 사소한 갈등들은 이런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산 샴푸인데 네가 다 쓰고 왜 너는 사지도 않아?”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회비’ 개념이 필수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생활공간을 셰어 할 생각이라면 그 시작점인 ‘경제’부터 셰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놀이동산에서의 더치페이가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었던 나는 다시 친구들과 함께 다른 놀이동산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 ‘회비제’를 제안했다. 회비 사용내역은 자유이용권 구매금액, 대략적인 점심 식대, 평균 간식 비용 등등. 사실상 놀면서 공유하는 건 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계산은 지금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 회비제를 제안한 내가 당연하게 총무를 담당했는데, 나는 지갑과 메모지를 들고 다니며 애들이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돈 내주고, 뭐 타고 싶다고 하면 돈 내주며 남의 돈으로 물주 노릇을 했다 - 친구들은 이런 나를 ‘아빠’라고 불렀다 - 처음엔 ‘횡령’에 대한 공포가 있던 친구들까지도 투명하게 작성한 내역서를 공개하고 나면 진짜 편하다며 만족하곤 했다. 그렇게 난 어렸을 때부터 ‘활동비’ 담당이 되었다.
물론 나의 의지로.
자신의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은 생각보다 아주 중요하다. 수학과 담을 쌓았다며 숫자를 쳐다보기도 싫어하거나, 놀면서 꼼꼼하게 영수증을 챙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총무가 되어선 안 된다. 여러 명의 친구가 모여 ‘저번에 내가 했으니, 이번엔 네가 해라’ 이런 식이면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횡령 의심’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돈 문제는 예민해서 내역이 투명하지 않으면 쉽게 마음이 상하는 계기가 되는데, 총무는 어떤 그룹이든 한 사람이 전적으로 담당하는 게 좋고, 그룹은 그 사람을 믿기로 했으면 내역서까지 믿는 것이 좋다. 만일 그룹 안에 그런 존재가 없다면 더치페이가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친구들에게 횡령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각자 얼마를 냈고, 얼마를 어디에 사용했는지 투명하게 기록해야 한다. 나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엔 현금결제와 메모지를 이용했고, 첨단 기술이 발전한 요즘은 ‘놀이 통장’과 체크카드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적정선의 회비를 걷고, 그 회비 안에서 즐겁게 먹고 논다. 남은 돈이 있다면 십 원 단위까지 계산해서 각자의 통장으로 이체해주고, 모자라면 그것 역시 십 원 단위까지 정산해서 입금 요청을 보낸다. 처음엔 전체 내역을 엑셀에 정리하여 친구들에게 통장 캡처 본과 함께 투명하게 공개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보는 것마저 귀찮아해서 보통은 그냥 내가 알아서 계산하고 돈을 주든지, 청구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한다. 십수 년을 알고 지낸 친구들은 정산 내역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이건 내가 총무로서 지난 세월 동안 그들에게 얻은 신뢰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총무’ 활동의 경력이 이어져, 우리의 생활비도 자연스럽게 내가 정산하게 되었다. 일단 직장을 다니는 우리 둘은 월 소득을 완전히 투명하게 공개하지는 않았고 - 월급 공개는 자칫 타인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수 있으니 반드시 삼가야 하는 것 중 하나라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 대략적인 연봉을 서로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매달 소득 격차에 따라 5:5에서 최대 3.5 : 6.5 정도로 배분하여 부담한다. 매달 목표 생활비가 100만 원이라고 가정했을 때 각각 50만 원씩 내거나 그달 소득이 적은 쪽이 조금 덜 내거나 하는 식이다.
생활비에는 거주지의 월세, 관리비, 장보기 비용, 각종 공과금, 외식비, 가끔 있는 문화활동비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생각보다 고정 지출이 커서 매달 목표 생활비를 초과하고 있다. 고정 지출되는 비용은 월세, 관리비, 인터넷, TV, 정수기, 공과금, 도시가스 등이다. 그리고 식비와 외식비가 들쑥날쑥한 와중에 우리의 귀차니즘으로 인한 외식비, 특히 배달 음식비가 늘어 엥겔지수가 폭등하는 상황. 덕분에 매달 생활비를 초과하지.
초과한 생활비는 매 월말 정산하여, 월초에 소득 격차에 따라 나눴던 것과 같은 비율로 배분하여 추가 부담한다. 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말을 한 번에 이해할 텐데,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 알은 이렇게만 말해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극혐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한다. 아마 내가 계산 실수를 해도 모를 것이 분명하지만, 내가 또 그런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성격이기도 해 이런 관계가 무탈하게 유지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