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이것만큼은 역할 분담을 할 수가 없다.
생활비는 각각 5:5 에서 최대 3.5 : 6.5 정도의 비율로 내며 뇽이 현금을 취합하고, 영수증을 모으고, 정산한다. 더 짧게 말하면 생활비는 뇽이 전적으로 관리한다. 이것만큼은 역할 분담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내 용돈 관리에 있어서도 영수증 모으기는 고사하고 매월 카드 결제 상세내역도 확인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썼으니까 내라고 하겠지. 이미 쓴 돈을 다시 살펴보면 뭐 하나 마음만 아프지… 라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아, 엄마가 아시면 뒷목 잡으시겠네 - 어떤 때는 생활비 카드로 결제해야 하는데 계산대 앞에서 그 카드를 못 찾아서 개인카드로 결제해놓고, 영수증을 아무 데나 두는 바람에 생활비에 포함하지 않고 넘어가 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나에게 있어 돈 관리란, ‘급여에서 적금과 보험료, 공동 경비 등의 고정비를 뺀 나머지를 적당히 쓰고, 남으면 비상금으로 두는 것’으로, 이미 쓴 돈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잊어버린다. 회사에서 영수증 처리를 할 때는 10원이 맞지 않아도 불안해하지만, 회사에 모든 기력을 쏟아부어서 그런지 집에서는 숫자를 살펴보겠다는 의지가 좀처럼 발동하지 않는단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집에는 정산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뇽 총무님이시다.
뇽의 정리벽은 책상이나 찬장보다도 컴퓨터와 휴대폰 안에서 빛을 발한다. 카테고리화되지 않은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뇽의 바탕화면은 러시아 인형처럼 잘 쌓인 하위 폴더를 품은 대표 폴더 몇 개만 있으며, 각종 사이트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엑셀로 정리 해두었고, 굳이 NAS(Network-Attached Storage)까지 따로 마련하여 날짜별, 주제별로 자료를 정리해 놓은 자타공인 폴더링 성애자다 - NAS 안에 내 몫의 폴더도 따로 마련해주었지만, 내 구역에는 ‘핸드폰 사진’이라는 폴더에 날짜 구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많은 사진이 두서없이 섞여 있다 - 영수증 또한 냉장고에 자석으로 차곡차곡 고정해놓고, 그 위에 할부로 결제한 품목은 포스트잇을 따로 붙여놓았다가 월별로 묶어서 혼자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여기에 내가 무슨 의견을 더 보탠단 말인가. 그냥 열심히 하라고 커피라도 타 주는 게 낫지.
같이 살기 전부터 외식이든 여행이든 결제의 순간이 오면 항상 뇽의 카드를 내밀었고, 나는 나중에 카톡으로 날아온 정산서를 보고 입금하는 방식으로 결제를 진행했다. 우리 둘만이 아니라 모임의 규모가 더 커져도 정산을 하는 것은 뇽의 역할이었고, 나는 가끔 미입금한 사람이 있는 경우 독촉하는 일, 혹은 현금 보관함 역할을 담당했다. 주로 여행 멤버로 함께 하는 친구, 금이의 경우에도 정산에 무관심한 것은 나와 마찬가지여서, 둘 다 뇽이 카카오톡으로 정산내역을 올리면 감사의 이모티콘을 찍고 얼른 입금부터 해버린다. 장담하건대, 금이도 그 정산 내역을 정독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해외여행의 경우에는 비행기표, 숙박비, 현지교통비, 식비 등 선결제와 현장 결제가 뒤엉켜서 대체 예산이 얼마가 필요한지 쉽게 감이 오지 않는다. 심지어 환율 계산이라는 미션이 추가되니 더욱 머리가 아프다. <꽃보다 청춘 - 라오스> 편에서 호준이가 여권이고 캐리어고 다 없어도 연석이만 있으면 된다고 해맑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 역시도 여행 준비의 1순위는 뇽이다. 이렇게 대놓고 의지하면 짜증 날 법도 한데, 놀랍게도 뇽은 내가 비용 처리에서 완전히 손을 털어버린 것을 개의치 않는다. 본인은 여행 예산과 이동 경로를 짜는 것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라 매우 즐겁다며, 나의 가책을 덜어주는 관대함을 보였다.
대신 무념무상인 나에게도 장점은 있었으니, 항상 완벽할 것 같은 뇽의 계산에 오류가 발생하여 급전이 필요한 순간, 비상용 카드나 현금을 늘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 날 택시비로 미리 빼놨던 현금의 용도를 뇽이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돈이 남았다며 모처럼 여유 있게 지출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이 되어서야 사라진 현금의 정체를 깨달은 뇽이 절규할 때, 인근 한인타운에서 출금할 수 있는 은행 카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나님이시다. 이 카드는 그 후 대만 여행 마지막 날 타이완 국립대학교 ATM에서도 유용하게 쓰였다. 기념품은 각자 카드로 구매하기로 계획했건만, 정작 기념품샵이 현금만 받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마터면 돈 쓰는 기쁨을 놓칠 뻔한 위기 - 혹은 절약의 기회 - 에서 나는 다시 한번 히어로가 되었다.
아무튼, 생활비를 모으고 정산하는 일은 전적으로 뇽의 몫이 되어버린 지가 오래다. 그런데 생활비 부담의 비율은 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사실 나는 처음 살림을 합쳤을 때 ‘생활비는 단순하게 반반씩 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뇽은 두 사람의 연봉이 차이가 날 때는 더 버는 사람이 좀 더 내는 게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독립 초반에 뇽이 더 버는 입장이어서, 근 1년이 넘게 뇽이 월 10만 원씩 더 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은 어쩌다 보니 내가 요만큼 더 벌어서 월 5만 원 정도 더 부담하고 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서로 일을 그만두거나 갑작스럽게 지출이 느는 등의 이유로 자금난에 시달릴 때 5~10만 원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고로 이 방침은 앞으로도 유지할 생각이다.
이렇게 끌어모은 생활비를 어떻게 쓰는가 하면, 사야 할 품목이 많을 때는 대형마트에 함께 가고 소량 구매는 각자 필요한 품목을 미리 공유하고 나서 주문한다. 뇽은 본인 용돈으로 개인적인 소비를 할 때도 컴퓨터, 카메라, 휴대폰 등 목돈 들어가는 품목을 한번 크게 지른 다음 몇 달을 양말 한 켤레 사지 않고 버티는 반면, 나의 경우에는 컴퓨터, 카메라, 휴대폰은 사망 선고를 받을 때까지 아껴 쓰면서 정작 블라우스나 스타킹, 가방, 파우더팩트 등 비교적 저렴하게 살 수 있는 품목을 험하게 다루고 자주 산다 - 1년간 둘이 쓴 돈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
이런 개인적인 소비 성향이 공동 경비 사용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복합기, NAS, 온수 매트, 스쿼트 머신 등 큰 기구는 뇽이 선택했고, 발포 클리너, 홈 드라이 세제, 곰팡이 제거제, 유리닦이, 수건 등 자잘한 건 죄다 내가 주문한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접속하면 피드에 각종 타겟팅 광고가 뜨는 나, 호갱님의 지름에 대해 뇽은 대체로 찬성하는 편이고, 나 역시도 뇽이 고른 물건에 대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별다른 분석의 과정 없이 동의한다. 둘 다 본인이 주문하는 제품에만 꽂혀있는 상태라 상대방이 장점 브리핑을 하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고, 설령 그 물건의 효능이 기대 이하라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죄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간다. 좋게 말하면 둘 다 지출 품목이나 결제 금액 등에 까탈스럽게 굴지 않아서 이런 거로 다툴 일은 없다.
다만 둘이 똑같이 할인이나 포인트 적립에 연연하지 않고 재테크에도 큰 관심이 없어서, 돈을 더 아끼거나 목돈을 모으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 우리의 재테크는 오직 로또뿐일지도 -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알뜰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오빠에게서 각종 할인과 포인트 적립 정보를 쇼핑몰 알람처럼 받고 있지만, 그걸 제대로 써먹은 경우는 열에 한번이 될까 말까 하다. 드라마도 제때 챙겨보는 게 귀찮아서 최애의 출연작 외에는 본방 사수를 안 하는데, 할인을 받기 위해 그 날짜에 맞춰서 외식이나 장보기 일정을 수행할 열정이 있을 리가. 할인은 온라인 최저가 검색으로 퉁치고, 어쩌다 시간 여유가 넘쳐날 때 동네마트 몇 군데를 돌면서 가격 비교를 하는 것이 노력의 전부다. 독립 이후 나에게 퇴사로 인한 한 달의 휴식기가 주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는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트 세 군데를 돌면서 두부와 마파두부 소스와 채소를 각각 다른 곳에서 구입하는 의욕을 보였다. 그날 할인받은 금액이 클수록 마치 수입이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뇽에게 자랑했지만, 이직과 동시에 마트 순회의 나날은 칼같이 막을 내렸다.
적립 포인트가 소멸 임박해도 그 타이밍에 필요한 물건이 없으면 포인트를 날려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점, 그리고 맛있는 과일 앞에서 가격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뇽과 나는 이렇게 잘 통할 수가 없다. 봄,겨울에는 딸기 축제를 벌이고 -장희딸기만 5주 연속 사 먹는 기록을 세웠고, 킹스베리와 금실딸기, 죽향딸기까지 섭렵했다 - 여름에는 물숭아와 12브릭스 수박을, 가을에는 단감과 홍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장을 본다. 우리는 생활비를 사이좋게 잘 쓰고, 텅장을 메꾸기 위해 나란히 울면서 출근한다. 이런 화목한 가난뱅이들, 오래오래 열일할 지어다.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