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처음인 날들.
처음은 낯설고 설레고 어렵고. 희망이고. 또 아지랑이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와 함께하게 된 날, 역할이 하나 더 늘어났어요.
저는 '나'이자, 부모님의 딸인 '나', 아내인 '나', 그리고 엄마라는 '나'의 역할을 추가받았습니다.
대학교 수업 때 철학 관련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저한테는 저 스스로가 '나'이고 옆 친구에게는 그 사람이 즉 '나'에요.
그런데 저는 다양한 '나'를 가지고 있죠.
이 수많은 '나'를 세상은 어떻게 구분하는 걸까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나'가 존재하는 걸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쉽지 않았다는 기억만 남았어요.
아이는 뱃속에 있다 세상 밖에 나와 하루하루가 얼마나 낯설었을까요. 매일이 어제는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 투성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도 그랬어요. 엄마가 처음이었죠. 저 역시 아이와 함께하는 제 모든 일상이 새로운 것 투성이었어요. 그 전과 똑같은 집에 있는데도 그 어느 곳에도 저의 공간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았어요.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많은 물건이 필요했어요. 아이 기저귀, 젖병, 세제, 내의, 수건, 이불 하물며 모유저장팩까지(모유저장팩이라니, 내 인생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였는데). 모든 물건이 다 제 머릿속에 들어왔고 저는 그 각각을 어떤 아이템을 살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분명 출산 전에도 많이 고민했는데, 계속 그 다음단계로 나가지 못하고 고민이란 상태에 머무른 것 같아요.
물건을 고를 때 검색결과페이지를 거의 10까지 모두 눌러보는 저는 결정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잠에서 깨어있을 땐 항상 아이 육아용품과 책을 찾아봤어요.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어떤 걸 사면 좋을지 매일 고민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와 뭘 해야 하는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낯설고 몰라서 그 많은 시간을 물건이라는 것에 스스로 잡혀있던 것 같아요. 제 자신에 대해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라고 떠올리고 아이와의 시간을 그냥 받아들이고 기다렸어야하는데, 그 시기에는 그렇지 못했죠. 그리고 어느 순간 저는 제 상태가 산후 우울증 초기라는 걸 감지했습니다.
출산 전 우연히 기사를 읽었는데, 산후 우울증의 증세로 인해 결국 범죄자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를 보고 저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도움을 청할 테니 그때는 열일 제치고 나를 돌봐달라고요.
그 순간이 왔음을 알고 바로 남편에게 얘기했어요. 남편은 아무 반문도 하지 않고 그날부터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 왔습니다. 퇴근한 남편과 집 앞 공원을 산책하고 남편은 제게 회사에서의 하루 일과를 말해주었어요. 생각해보니 저에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한 번의 쉼이 없었어요. 이직하면서도 하루만 쉬고 다음 회사에 바로 출근했죠. 회사생활, 즉 루틴 한 삶에서 벗어난 건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 3개월과 아이 출산과 양육을 위한 육아휴직 기간이 두번째였어요. 새로움이 가벼울 땐, 아이라는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땐, 한없이 즐겁다가, 제 루틴을 흩트리기 시작하니 불편함을 느끼고 다시 제 자리를 찾으려 한다는 걸요. 제가 그런사람인걸 처음 알았습니다.
어느덧 아이는 만 4세를 바라보고 있어요. 엄마 역할을 벌써 47개월을 해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엄마라는 역할에 익숙해졌어요. 이제는, 아이를 대하는 엄마라는 '나'를 스스로 낯설어 부정하고 싶은 상황은 더 이상 없어요. '내가 내 아이를 싫어하나'라는 진지한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머리로 제가 납득이 되지 않았고, 그런 제 자신을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웠습니다. 모성애가 있는 엄마는 그럴 수 없잖아요, 이 사회가 그렇게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러다 어느 날, 저는 나 자신에 대해 '뭔가 잘못되고 있는게 맞아'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남편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래, 나란 사람은 원래 시간이 좀 필요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저를 잠시 사회의 기준에서 분리시켰어요. 그리고 다행히 저에게 시간이 조금 더 주자, 무난한 엄마의 역할로 돌아왔습니다.
마음이 예민한 저는 성장의 모든 처음이 어려웠습니다만, 아이의 엄마라는 '나' 역할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