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어떤 이름이 머릿속에 안개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뿌옇게 내려앉은 그것은 기억을 먹고 점점 구름처럼 부풀더니 이윽고 비가 되어 새벽을 적셨다. 그 이름에 대해서는 꺼내 놓은 말보다 눌러 담은 말들이 훨씬 많다. 함께 짧은 추억을 써 내려가는 동안에도 미처 못다 한 이야기가 한가득 넘실거렸다. 이제와 돌아보면 조금 덜어내는 것이 내 나름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불안한 시기에 나를 만난 그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만 수줍은 눈빛과 떨리는 호흡을 그가 사랑으로 읽어주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는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이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처럼 흐릿하다.
흐릿한 기억의 앨범 속 선명히 남은 유일한 사진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게 씁쓸하다. 울먹거리면서도 힘주어 또박또박 뱉은 말은 곧 후회로 밀려왔다. 애써 냉소적인 척하지 않고 솔직한 마음을 꺼내놓았다면,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을까? 온몸에 달라붙은 미련을 떼어내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와서 보면 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에게 외면 당해 날카롭게 벼려진 기억들이 종종 나를 따끔하게 하는 것도 이제 더 이상 슬프지만은 않다. 그가 나에게 냈던 생채기와 흠집들은 차치하고, 어느 한 시절을 잠시 빛내주었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으려 이렇게 손끝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