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짐이라는 불행

by 소혜


여름이 가기 전 콩국수를 먹기 위해 부지런히 약속 장소로 향하던 어느 저녁이었다. 택시 안에는 희미한 라디오 소리가 선선한 밤공기처럼 퍼지고 있었다. 푸근한 인상의 기사님은 내 목적지를 보고는 자신도 콩국수를 좋아한다며 굳어 있던 차 안의 공기를 금세 말랑하게 녹였다. 나는 극 내향인이지만 무례하지 않게 대화를 이끄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레 마음이 기우는 편이다. 맛있는 곳을 추천해 달라며 화답하는 나에게 그는 자신의 맛집리스트들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가 제법 짧아진 도시의 소음 속, 그와의 잔잔한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작가님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관계의 밀도와 대화의 농도는 꼭 비례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와 손님이라는 느슨한 관계로 만난 우리의 대화는 어느덧 찻잔 속 티백처럼 짙게 우러났다. 그는 글을 쓴다는 나에게 꽤 묵직한 질문을 툭 던졌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의 존재 가치가 불안정하게 느껴져서 불행하지 않을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생각하면 행복하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그것도 이 질문에 답이 될 수 있겠네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잊혀진 사람이래요.


그는 해묵은 이야기를 담담히 꺼내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 첫사랑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슬픔 속에 살던 그는 시간이 흘러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고 한다. 영영 못 잊을 줄 알았던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흐릿해지고 말았다며 사람 좋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자, 문득 좋아하는 시의 구절이 떠올랐다.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 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 개 가졌더라도

-안희연, 「슈톨렌」


커다란 바윗덩이 같던 죽음의 무게가 퍼즐 한 조각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감히 헤아려본다. 어쩌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인생보다 길지도 모를 시간.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면서도 목적지를 향해 능숙하게 운전대를 돌리는 그의 옆얼굴에는 옅은 쓸쓸함이 묻어있는 듯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인간이 남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망각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육체가 사라졌다고 해서 남겨진 이들의 기억마저 삭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보다 그녀를 빨리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이 미안했다고 한다. 아마 고통스러워서 빨리 잊고 싶은 마음과 그녀를 불행하게 둘 수 없어 자꾸만 상기시키려는 마음이 수없이 충돌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아직 숨이 멎지 않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저녁 맛있게 드세요. 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껏 쓰면서 사시길 바라요.


그날 좁은 차 안에서 나눴던 이십 분 남짓한 대화는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바람으로 이곳에 적혔다. 이 보잘것없는 기록이 나에게 영감을 준 그를 조금이나마 불행에서 멀어지게 하기를 바란다. 잊혀짐이 떠난 이에게 너무도 큰 불행이라 생각해 죄책감이 든다는, 따뜻하고 다정한 그의 안녕을 바라며 이 글을 남긴다.

그분은 분명 행복하실 거예요. 그때도, 지금도.

하지 못했던 말을 이렇게라도 전하며.





물망초 꽃말: 나를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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