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향
호주에 온 뒤로 주말이면 열심히 놀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지난 주말의 목적지는 모튼 아일랜드. 결코 싸지 않은 가격 때문에 망설여졌지만 언제 또 와보겠어, 하는 생각으로 크게 고민 않고 투어를 신청했다. 이곳에 온 뒤론 모든 결정이 그런 사고로 처리되는 중이다.
같이 간 친구들이 많았지만 오늘은 개인적인 상념만 늘어놓고 싶다. 이건 정말 앞으로의 삶의 방향성을 뒤흔들 만큼 강렬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순간이 유달리 환상적이었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하얀 거품마저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로 그날의 날씨 또한 완벽했다. 섬 가까이에 다다르자 생경한 물빛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비로소 '에메랄드빛 바다'가 실재함을 알게 되었다.
액티비티는 카약킹-스노클링-샌드보딩 순으로 진행되었다.
같이 탄 친구와 함께 구령에 맞춰 열심히 노를 저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부는 바람을 이겨내고 원하는 방향으로 카약을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탓에 지나가던 다른 카약들, 심지어는 큰 요트에도 부딪히기 일쑤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지만 모두들 괜찮다며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카약을 밀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바다 안쪽으로 들어가게 우리는 수면 위에서 바닷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스노클링을 위한 바디 슈트, 마스크, 오리발을 장착한 우리는 제스트키에 매달려 난파선 근처로 향했다. 의지할 것이 사라지자 순간 공포감이 몰려왔다. 산소마스크의 이질감은 숨 쉬는 법을 잊도록, 끝없이 뻗은 바다는 오랫동안 배운 수영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 앞에 놓인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단단한 철근 사이에 피어난 산호초. 반짝이는 비닐을 지닌 물고기들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 너무 낯설어서 믿어지지 않는 그런 장면들의 연속.
가장 기대했던 액티비티는 단연 샌드보딩이었다. 우리는 사파리 버스를 타고 사구로 이루어진 모튼 아일랜드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가이드는 신발을 벗기를 추천했다. 뜨겁게 달궈진 지면 위로 발을 내딛자, 순식간에 고운 모래가 발등을 감쌌다. 발이 젖어있지 않음에도 걸음마다 새겨지는 축축한 발자국이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에 흔적을 남김을 반증하는 듯했다. 텅 빈 사막을 감싸고 있는 초록 숲과 만년설 같이 하얀 모래, 그 가운데 서 있는 나. 거대한 우주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먼지 한 톨 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 엄청난 경사를 지닌 언덕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정상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가장 선두에 있던 사람의 나무 보드에 양초를 잔뜩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엎드려 출발하기를 지시했다. 다치지 않도록 상체와 팔꿈치를 들고 타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두려움이 커졌다. 설상가상 내 앞 순서였던 사람 몇몇이 다치기까지 했다.(다행히도 가벼운 찰과상이었다.)
문득 세부에서의 캐녀닝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나는 놀이공원에서 탈 수 있는 놀이기구의 최대치가 후룸라이드인 사람이다. 그러나 출구가 한 곳뿐이라는 가이드의 말에 속아 울며 겨자 먹기로 8m 높이의 절벽에서 다이빙을 했는데, 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한계를 뛰어넘은 느낌에 굉장히 뿌듯했었다. 이번에도 그런 성취의 순간을 기대하며 보드 위로 몸을 맡겼다.
7초 정도 지났을까. 어느새 나는 사막 가장 낮은 곳에 누워있었다. 착지하는 과정에서 몇 바퀴 데굴데굴 구른 탓에 내 몸의 모든 구멍에 모래가 가득 찬 느낌이었지만,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진짜 문제는 어마무시한 경사의 오르막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려가는 길보다 올라오는 길이 더 공포스럽다는 건, 새삼스럽지만 인생의 이치와도 같았다.
나는 다시 해안가로 돌아오자마자 열을 식히기 위해 곧장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때가 아마 모두들 돌아갈 채비를 하던, 출발 5분 전이었을 것이다. 나와 함께 바다에서 놀던 친구는 내가 뭐든지 겁 없이 도전해서 좋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성격이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무모한 짓을 벌인 대가로 온몸에 짠기가 가득한 상태로 집에 돌아가야 했으나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갑판에서 나른한 음악을 들으며 젖은 몸을 말리던 장면은 손에 꼽을 만큼 완벽한 추억이 되었다.
배 위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는 것, 따사로운 햇빛을 잔뜩 머금는 것 그리고 떨림 하나 없이 잔잔한 표면을 유영하는 것. 이곳에서 난 나의 지향이 바다였음을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