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만들어내는 행복
누사는 브리즈번에서 1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휴양도시이다. 터키 친구 살먼 덕분에 처음으로 차를 타고 근교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나도 국제 면허증을 발급받아오기는 했지만, 운전석 위치가 반대일뿐더러 렌트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살먼은 이곳에서 우버 드라이버로 일하기 위해 차를 샀다고 했다.
오늘의 여행 메이트는 살먼, 프랑스 친구 예니스 그리고 일본 친구 나오였다. 호주에 오기 전까지 이런 조합은 상상도 해볼 수 없는 거였다. 누사까지는 차로 2시간 정도 걸렸는데, 날씨는 내내 변화무쌍했다. 예니스는 해가 나오면 선글라스를 끼고 비가 내리면 선글라스를 벗기를 반복했다. 차 안에선 터키, 프랑스, 일본, 한국 노래가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천만다행으로 누사의 날씨는 쾌청했다.
가장 첫 번째 코스는 국립공원 트래킹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해안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으나 결코 만만한 코스는 아니었다. 예니스와 살먼은 자신들은 이제 호주 사람들이 다 되었다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던졌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같은 학교 친구 베스찬을 만났다. 역시 산의 민족이라 그런지 등산화에 백팩까지 아주 단단히 준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베스찬에게 놀랐던 건 다른 데 있었다. 함께 수다를 떨며 걷다가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마주치면 가장 먼저 달려가 상태를 살피는 게 아니겠는가. 알고 보니 스위스에서는 그게 법이라고 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모든 사람을 내 이웃처럼 생각하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인류애 넘치는 법이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게 우리는 돌핀 포인트까지 함께 걸었다. 비록 돌고래는 보지 못했으나 파도에 침식된 암석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베스찬과는 그곳에서 헤어졌다.
트래킹을 시작한 지 40분 정도가 지나자 급격한 허기가 몰려왔다. 결국 중도 하산을 결정한 우리는 근처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한 명은 무슬림, 한 명은 글루텐 프리, 또 다른 한 명은 락토 프리. 이곳에서 만큼은 내가 잡식 인간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도 음식을 남긴 건 나뿐이었다. 식당에 갈 때마다 컨테이너를 요청하는 건 이제 관례가 되었다.
다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자연스레 다음 목적지는 카페로 정해졌다. 그런데 차를 타고 근처 카페로 가던 중 갑자기 살먼이 방향을 틀었다. 남는 게 시간인데 다른 바다도 들러보자는 게 이유였다. 이때는 우연히 발견하게 된 그 장소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페레지안 공원에 들어서자 신비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멀리서 보면 앙상한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곳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새와 곤충들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곳. 그야말로 생명력 넘치는 곳. 그런 곳을 지나 오랜 세월 동안 모래에 파 묻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계단을 오르니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해변에는 강아지들과 함께 온 몇몇 사람들이 전부였다. 강아지들의 발자국이 사람들이 발자국을 압도하는 해변이라. 낯설고도 생경했다. 파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강아지들을 보고 있자니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충실했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최상의 기쁨.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 그러한 광경을 만난 나. 우연히 만들어내는 행복은 그 무엇도 따라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종일 영어만 쓴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하긴 서투른 실력이라도 영어가 아니면 소통 자체가 불가능했다. 우리는 짧은 영어로 정치, 페미니즘, 역사, 소소한 가십까지 별별 얘기를 다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 문득 이 친구들과 이렇게 노는 게 평생의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