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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알라 탐험

동물원을 보이콧합니다

by 영영

사실 난 동물원에 가고 싶었다. 근처에 주 최대 규모 동물원이 있었고, 퀸즐랜드에 살면 꼭 한 번은 가 봐야 하는 곳이라며 여러 명에게 추천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이 놀러 가기로 한 친구 중 한 명인 카이가 동물원 입장료가 부담된다는 말을 넌지시 건넸다. 대신 Whites Hill을 제안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목적지는 동물원에서 야생 언덕으로 바뀌게 되었다.


Whites Hill은 야생 코알라와 새들을 만나볼 수 있는 nature trail(*자연 탐사 오솔길)이다. 평범한 숲길 같아 보이는 곳에 멸종위기종인 코알라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지만, 반신반의하면서도 한편에는 기대되는 마음이 자리했다. 탐험 메이트들은 카이, 아야네, 코키, 나츠키, 애나, 가브리엘로 타이완에서 온 애나와 콜롬비아에서 온 가브리엘은 이날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정오가 지나면 코알라들이 자취를 감춘다는 말에 우리는 일찌감치 모여 Whites Hill로 출발했다. 카이가 이끄는 대로 따르는 길, 문득 팔로워가 되어 떠나는 이 여정이 굉장히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더의 수고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절대 불평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2시간이 넘도록 돌아다녀도 코알라는커녕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거였다. 강렬한 자외선은 더 이상 타고 싶지 않아 입은 긴 셔츠를 벗게 만들었고, 챙겨 온 시원한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걷는 동안 3팀 정도를 마주쳤는데 모두들 입을 모아 오늘은 운이 따르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설상가상 시간은 정오를 넘겼다. 처음부터 동물원에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슬슬 지쳐가던 찰나 우리는 갈림길을 마주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버스정류장, 직진하면 또 다른 숲길로 이어지는 오르막. 카이는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의 의사를 물었다. 모두들 분명 지쳐 보였지만 아쉬운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점심도 먹지 않은 채 걷고 또 걷기를 선택했다.




코알라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나무 꼭대기롤 쳐다보며 걷다 보니 뒷목이 뻐근했다. 다시 의지를 불태운 것도 잠시, 곧 카이를 제외한 모두가 코알라 찾기를 포기한 듯 보였다. 그렇게 우리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지는 동안 카이는 저만치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카이의 뒷모습에서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걸은 지 3시간쯤 되었을까. 100m쯤 떨어진 곳에서 카이가 상기된 표정으로 손짓해 보였다. 들뜬 마음을 감추고 카이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설마 하며 카이가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옮기니 그곳에 정말 코알라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우리는 금방 근처에서 다른 코알라 한 마리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자연 속에 당연한 듯 살고 있는 코알라를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나무 기둥을 꽉 쥔 발톱이 무색하게 표정만큼은 누구보다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빳빳한 회색 털을 한 번만 쓰다듬어 봤으면 싶었지만 금세 그런 마음은 접어두었다. 그래, 너희들은 사육사가 아니라 가족들 곁에서 살아야지. 동물원이 아니라 푸르른 자연 속에서 살아야지. 잠시나마 동물원 타령을 했던 스스로가 창피했다.




사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업무와 관련하여 동물원을 찾는 일이 잦았다.(내가 다니던 출판사에서 관련 분야 도서가 여러 권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당시에는 일에 찌든 탓에 동물원을 둘러싼 윤리적 쟁점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지 못했다. 솔직하자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오늘을 기점으로 나는 동물원을 보이콧한다. 동물원이라는 장소가 지닌 폭력성에 동의하는 마음으로. 본래 터전을 잃고 억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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