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누사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곳에서의 시간 중 가장 완벽한 날이었다. 종일 흐릴 거라던 날씨도, 발걸음 닿는 곳마다 마주치는 풍경도, 늘 맛없다고 생각했던 음식들도 이날만큼은 달랐다. 아니, 조금만 더 솔직해져 보자.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같이 간 친구와는 불과 1주일 전에 알게 된 사이였다. 곧 집으로 돌아가는 그 친구는 돌아가기 전 꼭 다시 한번 누사를 찾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가까워진 게 너무 오랜만이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았다. 처음에는 분명 그냥 그렇게 시작된 여정이었다.
우리는 차를 렌트하기 위해 브리즈번 공항으로 향했다. 그 친구는 본인의 말처럼 운전을 잘했다. 왠지 지는 기분에 나도 운전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타박을 받기까지 했다. 어디 가서 운전 못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이건 정말 전부 운전을 오랜만에 한 탓이다.
차를 세워놓고 호수 같은 바닷길을 거닐었다. 배로, 서핑보드로, 맨몸으로 한가로이 물 위를 떠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수영복을 챙겨가지 않았기 때문에 발을 담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친구가 타고 싶어 했던 제트스키를 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점심으론 새우 아보카도 피자를 먹었다. 밥을 먹는 도중 비가 쏟아졌다. 피자는 손에 꼽게 맛있었고, 대화는 생동감 넘쳤으나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앞으로의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내 표정이 읽히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뒷일을 생각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그래, 내가 뭐 언제부터 눈치 봤다고?
누사에서 메인 헤드 비치만 간 사람들은 진정한 누사를 맛봤다고 할 수 없다. 진짜는 그 옆 Sandy Cove에 있었다. 너른 바다와 하얀 모래가 번갈아 끝없이 펼쳐지는 곳. 어찌나 투명하던지 물기를 머금은 모래 위로 구름이 비칠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여우비마저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가 나타났다. 그곳에 걸터앉아 가만히 파도의 움직임을 들여다보았다. 사방으로 부서지는 꼴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아무에게도 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이 감정만은 남겨야 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일기를 쓴 건 꼭 반년 만의 일이었다.
그 후엔 언제나처럼 맥도날드에서 소프트 콘을 사 먹었다. 저녁은 선샤인 코스트로 이동해서 먹기로 했다. 선택한 메뉴는 쌀국수에 볶음밥. 밥을 먹으면서 했던 피상적인 이야기와 시답잖은 내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이 친구랑 있으면 내가 왜 이렇게 유치해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난 줄곧 그렇게 살고 싶었다. 열등감 따위 몰랐던 때로 돌아가 사소한 것에 웃으며, 순간의 행복을 마음껏 즐기며. 이 친구 앞에서의 내가 진짜인지, 그동안 내가 알던 내가 진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평생을 이렇게 살아 온 듯 익숙했다는 거.
이제 식사 후의 산책은 당연한 관례였다. 어느새 햇빛이 사라진 밤, 또 바닷길을 걸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진짜 짜증 나. 하루종일 뭐가 이렇게 완벽한 거지.
우리는 오래 고민 않고 모래사장에 누웠다. 커튼 같은 구름들이 별들을 가렸다가, 다시 나타나게 만들기를 반복했다. 발 밑으론 계속해서 사람들이 지나다녔는데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다들 우리를 이상하게 봤겠다-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달랐다. 이게 바로 내가 호주를 사랑하는 이유였다.
브리즈번으로 돌아오는 차 안, 매초마다 다양한 감정이 피어올랐지만 마음만은 더 이상 어지럽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가장 나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있잖아. 나는 이게 마지막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