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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의 의미

더치와의 데이트

by 영원 Feb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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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브리즈번은 온통 핑크빛이었다. 우리에게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로 알려져 있는 반면, 이곳에서는 남자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밸런타인을 보낸다는 건 곧 공식적인 데이트 상대임을 공표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빠르게 관계정립을 하지 않는 이들에겐 큰 용기가 필요한 날이 바로 이날인 거다.




길거리는 하루종일 장미 꽃다발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과 빨간색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붐볐다. 굳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저녁 약속이 있었다. 상대는 룸메이트 미란기의 소개로 알게 된 네덜란드 사람 재스퍼.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동갑 친구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태도와 눈에 띄는 이목구비 때문에 딱 봐도 얼굴 믿고 까부는 애인 듯 싶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며칠 동안 답장을 하지 않아도 연락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대게 내용은 재밌게 본 릴스를 보내거나, 스토리에 답장을 하거나,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묻거나 하는 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이었다. 딱히 부담스러운 요구를 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끊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어 공부하는 셈치자는 마음도 있었다.


관계의 전환점이 온 것은 멜버른 여행 도중에서였다. 여행 메이트가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하면서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지쳐있던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재스퍼였다. (*멜버른 여행기가 궁금하다면 전전글 참고) 습관처럼 던지는 플러팅과 대답 없이도 이어지는 걱정이 그때의 내겐 엄청난 위로였다. 평소였으면 짜증 났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다시 밸런타인으로 돌아가보자. 어떤 레스토랑을 예약했는지 끝까지 비밀에 부치는 모습을 보며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만 만난 건 처음이었음에도 이질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친구 사이였기에 차 문 열어주기, 의자 빼 주기 같은 행동들이 새삼스러웠다. 결국 가게 된 곳은 페르시안 레스토랑. 안 먹어본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내 말에 이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한다.


도중엔 재스퍼의 친구 커플이 합류해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에 약혼을 했다던 필립페와 마리아나,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움의 집합체였다. 한편, 내 영어실력에 진전이 있는지 확인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두 사람은 내게 칭찬만을 쏟아냈다. 정말 진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말도 안 되는 농담에 바로 반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늘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그 친구들과 헤어진 후엔 재스퍼와 캠퍼스를 산책했다. 어느샌가 손 잡기, 커들링 같은 가벼운 PDA는 너무나도 당연해졌다. 본인이 학교에서 잘생긴 것으로 유명하다며 자랑하길래 여느 때와 같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는데 정말 빌보드에 그 친구의 사진이 나오더라. 더 이상 그의 뻔뻔한 태도가 짜증 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 같다.




단언컨대 이 친구와 진지한 관계로의 발전을 그리고 있지 않다. 사실 이전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눈 적 또한 있다. 곧 떠날 처지인 내게 깊은 사고는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냥 매일을 즐기려 노력하고 있다.


회색빛의 금발. 녹색과 하늘색이 묘하게 섞인 눈동자. 길게 뻗은 속눈썹과 입꼬리.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우리에게 그나마 있는 공통점이라곤 해리포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4월에 있을 해리포터 테마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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