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한국인 친구
브리즈번에서 머물게 될 기숙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날 반겨준 건 중국인 친구들 미셸과 옌슈였다. 알량한 편견 때문에 경계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질 만큼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만난 지 이틀 째 되던 날, 우리는 다가올 긴 크리스마스 연휴에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호주는 요리 실력을 늘리기에 최적화된 환경이다. 외식을 하게 되면 비싼 데다가 대게 맛이 없기 때문이다. 시티에 살아 주변에 한인마트가 많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국에선 잘 먹지도 않던 김치를 주저 없이 담는 날 발견하고, 정말 집을 떠나온 것임을 실감했다.
어학원의 국적 비율은 일본인 55, 유럽인 35, 남미인 5, 대만인 3, 한국인 2 정도. 나는 우리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내게 가장 먼저 말을 걸어준 사람은 일본인 친구 코키였다.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앳된 얼굴에 작은 체구. 어른 같다기 보단 소년 같은 모습에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 관계. 호주에 온 이유.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같은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 코키는 일본인들 사이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해진다고 했다. 한국인 친구가 갖고 싶었던 내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새 학기 첫 등교날 교실 풍경을 그려보면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코키는 대화의 끝에 넌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종류의 칭찬을 들은 게 얼마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코키의 소개로 기숙사 근처 호텔에서 매주 목요일 밤마다 언어교환 클럽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목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호주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이곳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한국인과 어울리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일주일 만에 그 결심이 무너질지는 몰랐으나 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과 안도는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유리는 내가 브리즈번에서 만난 첫 번째 한국인 친구이다. 유리와 나는 언어교환이 있던 다음 날 저녁, 브리즈번 시내가 한눈에 내다 보이는 캥거루 포인트에 위치한 루프탑 바에서 다시 만났다. 일주일 만에 듣는 한국어가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유리는 휴학을 하고 워킹홀리데이를 온 학생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는 전공이 같았다. 게다가 유리의 남자친구는 내 대학교 후배였다. 우연은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것이었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말을 믿게 되었다.
정신없이 음식을 먹다 보니 170불 정도 나왔던 것 같다. 한화로 하면 15만 원 정도. 한국에서 이 정도 나오려면 소고기 정도는 먹은 건데.
"언니! 언니는 일을 안 하고, 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더 낼게. 내가 더 많이 먹기도 했고."
유리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유리의 그런 구김 없는 모습이 좋았다.
"유리야. 나랑 같이 여행 가지 않을래?"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었기에 거절해도 그만인 가벼운 제안. 그런데 유리는 그러자고 했다.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연휴가 점점 더 특별해지고 있었다.
나는 함께 여행 가자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려하기 위해 서로의 취향을 저버리는 것. 시간의 소요와 계획의 필요. 여행 후 관계 변화의 가능성. 음, 그러니까 내게 여행은 복잡하게 얽힌 이어폰 줄 같은 거였다. 나도 내가 낯설다. 단순한 사고는 넉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