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호주에 온 이유
비행기 옆자리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입국 신고서 쓰는 걸 도와드렸더니 할머니께서 앙금이 든 사탕을 건네셨다. 팥을 싫어해 팥빙수도 먹지 않는 나였지만 왠지 그 사탕은 먹고 싶었다. 낯설지만 기분 나쁜 맛은 아니었다. 10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동안엔 온다 리쿠 작가의 <꿀벌과 천둥>을 읽었다.
‘세상은 밝고, 한없이 넓고, 항상 흔들리며 쉽게 변화하는, 성스럽고도 두려운 장소였다.
…
농밀하고 생생한, 크고 작은 수많은 무언가가 시시각각 변해가는 주변의 공기 속에 충만했다.
그것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 <꿀벌과 천둥> 中
자, 내가 왜 호주에 가기로 결심했더라.
올해 4월, 나는 뜬금없는 궁금증으로 유학박람회를 찾았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호주 현지 유학원' 현수막에 이끌려 그 앞을 서성였더니 유학원 직원이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그 직원이 초등학교 시절 단짝친구였다는 건 상담이 끝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들었지만 확신은 없어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상담 대기 리스트에 적힌 내 이름을 그 친구가 알아본 것이었다. 하긴 그래. 내 이름이 흔한 이름은 아니거든.
그렇게 나는 이사를 떠나 9살 이후 보지 못했던 친구와 아주 오랜만에 재회했다.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호주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은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난 그 친구 때문에 호주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결정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던 작년, 나는 출판사 마케터로 일하기 시작했다. 인턴으로 시작해 정직원이 되었고, 사측의 배려로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2월, 졸업과 동시에 난 완전한 사회인이 되었다. 수석 졸업이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아등바등했던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내 삶이 보잘것없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쯤이다.
책상에 서류 뭉치 대신 책들이 쌓여있는 삶은 정말인지 낭만적인 거였다. 세상이 공개되기 전 먼저 내용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대표 교체에 따른 회사 신념의 변화, 조직 개편과 뒤숭숭한 사내 분위기는 사회 초년생인 내게 감당하기 벅찬 일이었다. 자존감이 떨어진 걸 회사 탓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난 급하게 이직을 준비했고, 퇴사한 바로 다음 날 영화제 사무실에 첫 출근을 했다. 이게 올해 3월의 이야기다. 영화제는 매년 계약직 직원들을 새로 뽑는다. 많게는 5차에서 6차까지 구인을 하기 때문에 사무실이 점점 북적이는 것으로 영화제가 다가왔음을 체감할 수 있다. 내가 입사했을 때의 분위기는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독서실에 가까웠다.
여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으나 영화제 업계는 특히나 더 좁다. 이 말인즉슨 거의 모든 자리에 내정자가 있고, 신규가 들어오기 힘든 판이라는 것. 우리 팀만 해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영화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잘 모르는 만큼 나를 갈아 일해야만 했다. 종래엔 내가 일을 하는 건지 일이 나를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국제 영화제인 만큼 내국인보단 외국인들이 주를 이루는 행사였다. 개막식에서 나는 게스트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때 내 영어실력이 발목을 잡았다. 어떻게든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나서 든 생각은 그동안 내가 공부한 영어는 뭐였을까하는 회환뿐.
한국사회에서 반 오십이면 해야 하는 것들이 정해져 있다. 친구들을 만나도 전처럼 실없는 농담만 주고받을 순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열등감 대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까닭에 늘 사진과 책과 영화를 꼭 껴안은 채 살아왔지만, 내내 다른 무언가가 아닌 내가 담긴 뭔가를 찾고 싶었다. 그 열망이 평생 동안 지녀온, 지금까지도 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불안을 이겼다.
하고 많은 도시들 중 브리즈번을 택한 건 단지 날씨가 좋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내다 보니 날씨가 그렇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고.. 아, 호주 사람들은 땅을 보며 걷지 않더라. 그래서인지 휴대폰을 보며 길을 걸으면 사회부적응자가 된 것만 같아 내 오랜 습관을 버리려 부단히 애쓰는 중이다.
이곳에 와서야 새삼 창문 밖의 세상이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고 있다. 강을 따라 배가 흐르는 방. 어딜 가도 초록빛이 일렁이는 도서관. 누군가는 평생 이런 풍경 속에서 살아왔을 거란 생각에 묘한 샘이 피어오른다. 한국에서 살던 오피스텔에선 커튼을 열어놓을 수 없었기에 몰랐던 사실이다.
6개월 뒤, 이 여정의 끝엔 과연 무엇이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