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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샘 Aug 26. 2024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리뷰

이 책은 서론과 마무리, 그 사이의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목차는 이러합니다

<실마리> 개인주의 유산

<가> 예수와 이스라엘

<나> 예수와 제자들

<다> 신약 공동체의 예수 추종

<라> 고대 교회의 예수 추종

<마무리>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산


내용이 길 수 있는데 3줄 요약하고 시작하겠습니다.


1. 예수가 바란 공동체는 "대안사회"다
2. 대안사회란 기존의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기존사회보다 더 나은 사회를 의미한다
3. 대안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생존과 행복을 더 용이하게 해주고, 기존의 사회도 개혁되도록 자극한다


이 책은 예수님의 사상은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그분이 바란 공동체상이 있고, 그것을 제자들과 교회가 실천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마리> 개인주의 유산

저자는 원래 천주교는 공동체 사상을 잘 온존해왔지만 어느새 매우 개인주의적으로 변했다며 문제를 제기합니다(15).


저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개념을 강조하면서 교회를 구체적인 정체가 드러나고 구원을 전달하는 공동체로 정의합니다(17).


이어 그리스도교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것임을 논증하기 위하여 <가>장에서 예수와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밝힙니다.


<가> 예수와 이스라엘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둘은 대립적입니까? 저자의 입장은 예수님의 사상과 행적은 처음부터 끝가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증거로 열두 제자의 선임을 제시합니다(28).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즉 온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재건되기를, 쇄신되기를, 진실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재구성(재집결)되기를 바란 것입니다(28).


"내가 너희를 모아 너희의 땅으로 데려오리라",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들일 때", "아버지의 백성을 모아"등 "모임"은 이 책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34-36). 이 "모임"은 단어 뜻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소속감을 공유하며 조직화되어있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의미를 전제로 깔고 나면 이후의 "모임"이 등장하는 문장이 나올 때 한결 읽기가 수월해 집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저자는 주의 기도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소서" 청원을 "아버지의 백성을 모아 새로이 하사 다시 참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소서"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36).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 속에 흩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입장입니다(34). 저자는 하나님 백성이 모여있는 곳에서 하나님나라가 시작된다고 보고 있습니다(36).



둘 중에 하나를 연결 지어야 한다면, 하나님나라(혹은 구원)는 ①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과 연결 짓는 것이 자연스러울까요, ②하나님의 백성과 연결 짓는 게 자연스러울까요? 저자는 예수님에게도 보편사상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 백성을 통해서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이 구원을 얻는다고 보고 있습니다(37). 하나님 백성의 매력에 이끌려 이스라엘에게 참여함으로써 믿음의 조상들과 같은 밥상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40-41). 반면 명목상 유대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에서 쫓겨나게 됩니다(43).


즉, 예수님에게 이스라엘이란 정태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민족을 가리키지만, 이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의식을 가지고 그 뜻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며, 이 모임에는 이른바 이방인들도 참여가 가능합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운동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조직이라고 말합니다(56). 이번 장의 마지막 단락은 함께 붉은 밑줄을 따라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가>장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노선을 보여줍니다. 이는 (가칭)만나교회의 노선에 큰 시사점을 줍니다. 만나교회의 노선은 교회 바깥에 기관들을 만들거나 구제활동을 펼쳐서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비기독교인을 데려다가 명목상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뜻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을 조직한 공동체, 즉 참된 이스라엘(교회)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본받을 만한 품행, 약자에 대한 연민, 공동체원 사이의 상부상조, 복음(하나님나라 도래)의 전파를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위한 가장 가시적이고 간편하고 부작용 없는 실천방법이 기본소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나> 예수와 제자들

예수님은 제자들을 왜 뽑으셨을까요? 제자단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대립적일까요? 저자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났어야 할 모습을 보여주는 공동체로서 제자단을 세우셨다고 말합니다(67). 대신하거나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하는 것입니다. <나>단락은 새로운 개념이 여럿 나오기에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저자는 산상설교를 비롯한 예수님의 어록, 특히 제자교육을 통해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였는지 전합니다.


1. 새로운 사회질서

제자들의 공동체는 세상에게 새로운 사회질서를 보여주는 모임입니다(71). 그 새로운 사회질서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이때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의 상대방은 개인도 아니고, 인류전체도 아니고, 이스라엘 혹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자단입니다(74)


2. 새가정, 끝난 아버지 노릇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가족과 재산을 버렸는데 그것을 백배나 받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새로운 질서에 합하며 가족과 재산이 재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가장이 되는 밥상공동체에 둘러앉아 여러 사람이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79).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는 백배로 돌려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 지배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85). 이 본문 이외에도 예수님은 "아버지"나 "스승님(랍비)"같은 호칭을 쓰지 말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마태 23:8-1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가장 큰 사람은,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마태 23:11).


3. 대조사회, 폭력의 단념

지배구조가 없고,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없고, 첫째가 되는 사람이 모든 이의 종이 되는, 모성과 우애와 자녀됨만이 남아있는 공동체, 화해와 우애가 다스리는 공동체, 저자는 그런 공동체를 "대조사회" 혹은 "대안사회"라고 명명합니다(92, 102).


저자는 그러한 대안사회에서 비로소 오른뺨을 맞았을 때 왼뺨을 돌려 대라는 완전한 "폭력의 단념"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112). 폭력을 쓰지 않는 개인은 무방비하고, 모든 사람의 폭력을 해제하는 것은 폭력 없이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개인이 폭력의 단념을 실천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렵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서로 폭력을 쓰지 않기로 약속한 공동체에 입회하는 일은 어떻습니까? 즐겁고 홀가분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가벼운 짐"이라고 말하시고,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이건 저의 해석입니다).


4. 산 위의 도시

한 가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대조사회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곳이나 단절된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위한 것,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단은 "산 위의 도시", "등경", "빛", "소금"으로 비유됩니다. 앞의 셋은 모든 사람에게 보여진다는 의미이며, 소금은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음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지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며 드넓게 빛을 비추는 도시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수긍될 수 있는 삶을 사는 공동체다"(119).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되지만,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나라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25).


이러한 공동체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백배의 결실을 맺는 씨처럼, 저절로 자라나는 씨처럼,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씨처럼, 반죽을 온통 부풀리는 누룩처럼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123).



<나>단락은 만나교회가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없는, 착취가 없는, 상하관계가 없는, 사람에 대한 평가나 비난이 없는, 보복이 없는, 그러나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처럼 상부상조와 사귐이 있는 공동체 입니다. 즉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모형을 만들고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대조사회입니다.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만 한다면, 귀의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 교회가 교계로, 시민사회로,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당연한 섭리일 것입니다.



<다> 신약 공동체의 예수 추종

<다>장은 서신서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공동체가 예수를 잘 따랐는지 검토합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교회는 예수를 잘 따랐다.

인종•언어•신분•성별과 같은 사회적 장벽들이 교회 안에서 상대화되었다.

신앙은 개인화되지도 않았고 보편화(사해동포주의)되지도 않았다. 언제나 공동체적이었다.

교회는 그 구성원을 최대한 지배하지 않으려 했다.

교회는 대조사회로서 외부세상과 날카로운 구분을 유지했다.

형제애의 법칙으로 다스려지는 대조사회는 외부인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는 외부 세상을 개혁한다.


이 장에서 중요한 개념은 "대조사회""이스라엘을 향한 만민의 순례"입니다.


1. 대조사회

대조사회(대안사회)란 기존의 세상•사회와는 다른, 더 좋고 매력적인 사회를 가리킵니다. 저자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본질을 대조사회라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은 이러합니다.

올바른 부의 분배, 가난이 사라짐

갈등이 일어났을 때 힘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화해가 일어남

차별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사라짐

아픈 사람이 버림받지 않고 치료받음

신경증을 앓는 사람이 공동체로부터 돌봄받음

정직하게 관계하고 서로를 목적으로 대함

개인이 고립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


2. 이스라엘을 향한 만민의 순례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유교의 천하제패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춘추전국시대 여러 나라가 경쟁할 때 군주들은 부국강병하여 천하를 제패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나름의 해결책을 내놓아 이들에게 유세했으니 이것이 제자백가입니다.


종횡가는 외교를 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농가는 지배층이 앞장서서 농사를 지으면 모두가 부지런해져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묵가는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면 만사형통하다고, 법가는 인간은 악하니 강력하고 일관된 법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법가가 진나라에 채택되어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만 가장 인기 있었던 사상은 유가입니다.


어느 날 한 왕이 자에게 어떻게 해야 천하를 얻을 수 있겠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른 정치를 하고 군주가 모범을 보이면 당신의 백성들이 배부르고 행복해하고 외국의 백성들은 당신의 나라를 부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당신의 나라로 오고 싶어 하게 될 것인데,  나라의 군주들은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당신의 나라의 본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군사를 일으켜 멀리까지 보내지 않아도 당신은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가의 천하제패 계획 "왕도정치"입니다.

<맹자> 양혜왕 상

이런 생각을 구약의 사상가들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따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부러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아차리게 되고 이스라엘의 본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제사장 나라", "이방인들의 순례"와 같은 개념은 이러한 구약 저자들의 전망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은 이사야 2장입니다.

2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3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4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2:2-4]


유교의 것이든 구약의 것이든 "멋진 신세계"를 만드는 나라가 전쟁 없이 천하를 얻는다는 공동분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계획을 잘 실행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배층은 제국에서 자신들이 당했던 대로 가난한 이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착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대조사회로 만들자는 운동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에 응하지 않자 예수님은 12제자를 선임하고 제자들을 공동체로 조직합니다. 그러자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만민의 순례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상이 저자가 묘사하는 신약공동체의 예수 따름의 모습입니다.



<라> 고대 교회 공동체의 예수 추종

<라>장에서는 2-3세기 고대교회의 문헌들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바란 공동체를 원초 교회와 같이 잘 유지해 왔는지 검토합니다. 요는 고대교회가 날카롭게 대조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강렬한 공동체 의식 또한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장에서는 여러 문헌을 통하여 고대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고독과 가난을 물리치는 사회보장조직이었고, 로마제국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대조사회였습니다. 이 사회는 이방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외부 로마사회를 개혁시켰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위 인용문은 로마황제 율리아누스의 것입니다. 반대자인 만큼 기독교가 가진 위험성과 전염성에 대한 진술은 믿을만합니다. 저자가 연대성을 기독교 파급의 원인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신약신학자의 바램이 아닙니다. 사회종교학자 로드니 스타크의 <기독교의 발흥>에 따르면 기독교는 애착관계, 간호서비스, 도덕적 미덕, 사회문제들에 대한 우월한 대응력이라는 개종의 이점을 갖고 있었고, 그 성장세는 10년간 40%로, 4세기가 되었을 때는 제국의 과반수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2-3세기 교회는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자매라고 불렀고,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관혼상제와 경제적 문제까지 돌보는 사회보장조직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부패한 이교도 사회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비상한 자아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268). 이러한 고대교회의 실천은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뿐인 현대 기독교인들을 흔들어 깨웁니다.


이 책을 읽자고 한 목적은 이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모습은 여러모로 로마제국시기와 비슷합니다. 패권국에서 나오는 사상이 사람들의 사고를 장악하고 있고, 사람들은 물신주의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기존에 윤리를 제공하던 철학과 종교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가난은 자살률의 상승과 출산율의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고, 사람들은 파편화, 개인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각자도생할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상부상조하고 심리적으로 서로 돌보는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자신의 생존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개혁시키는 방법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유산>

이 책은 마무리에서 주제를 요약하기보다는, 과거에 대조사회로서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이루던 교회가 어쩌다 지금과 같이 개인화된 모습이 되었는지 말합니다. 그 정치적인 기점은 "콘스탄티누스 전환"(313년 밀라노 칙령)이라고 합니다. 로마에 의해 공인되고 나중엔 국교가 되면서 제국에 포섭되어 버렸다는 것이죠. 또 하나의, 사상적인 기점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가 순전히 미래적이고 초월적인(타계적인)것이 되어버렸고 그에 따라 개인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피안화가 기독교인의 개인화로 이어졌다면, 하나님나라의 현실화는 기독교인의 공동체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저자가 수미상관으로 마무리했듯 이 글도 수미상관으로 마치겠습니다.


1. 예수가 바란 공동체는 대안사회다

2. 대안사회란 기존의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기존사회보다 더 나은 사회를 의미한다

3. 대안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생존과 행복을 더 용이하게 해주고, 기존의 사회도 개혁되도록 자극한다

4. 기본소득공동체 만나교회는 대안사회의 첫걸음으로, 십일조를 통한 기본소득을 실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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