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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흔한 단어 26화

작가

by Carroty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깨끗해졌다는 뿌듯함은 한순간이었다. 그릇은 다시 개수대에 담겨 있었고, 청소기를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엔 또다시 강아지 털이 흩날렸다. 게다가 집안일은 쌓아두면 쌓아둘수록 더욱 하기 싫어졌다. 한 번은 설거지가 너무 하기 싫어서 ChatGPT에게 물어보니 설거지는 그때그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설거지를 한없이 쌓아둔 상태였고, 무작정 해버리는 것이 유일한 답이었다.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해야 외출을 할 수 있고, 바닥 청소는 하루라도 건너뛰면 자신의 털로 재채기를 하는 고급 강아지 덕분에 눈치가 보인다.




회사를 다닐 당시, 저질 체력을 가진 나는 야근을 하고 오면 파김치가 되었고, 그런 나 때문에 남편은 가사와 본업을 혼자 묵묵히 해나갔다. 근 3년 동안 남편이 도맡아 하던 일을 불과 몇 달 만에 인계받게 된 꼴이었다. 설거지, 빨래, 청소 모든 일이 자연스레 내 몫이 된 현실에 문득 화가 났다. 남편이 출근하고, 점심을 먹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청소기를 돌리는데 문득 ‘나는 이제 가정주부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원하던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내가 퇴사한 이후로 가정주부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본인은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까지 생각이 미치자 씁쓸한 감정을 넘어 분노가 차올랐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니, 남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 남편에게 비장한 얼굴로 다가갔다. 팔꿈치를 굽혀서 주먹을 쥔 손을 가슴 옆에 붙였다. 그리고 남편에게 힘주어 물었다.


“나는 가정주부야? 그래서 혹시 집안일은 모두 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


거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편은 의아한 표정과 함께 나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본 남편에게 한번 더 물었더니, 남편이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근데 이 손은 뭐야?”

“몸집을 부풀려서 위협적이게 하는 거야.”

“이미 부풀리지 않아도 커다랗지 않아?”


남편은 나를 피해 도망갔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대화 때문에 우리는 웃음이 터져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서 남편이 말했다.


“출근하기 싫어. 하지만 몇 년만 참으면, 신작가님이 대박 나서 나 출근 안 하게 만들어줄 거잖아. “


남편은 내가 퇴사한 순간부터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를 작가가 아니라 가정주부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남편은 내가 퇴사하기 전부터 ’ 네가 좋아하는 거 해. 글 써. “라고 말하면서 나의 퇴사를 지지해 줬고, 그간 내가 글 쓰고 책 읽는 시간을 존중해 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 얼마 전에 퇴사해서, 백수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때, 내 친구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나를 작가라고 소개했던 일도 생각났다. 정작 나만이 나를 작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단편과 중편을 별도로 준비하고, 글쓰기 강의를 지속적으로 들으면서, 책만 읽고 사는 사람. 이 사람을 정의하는 단어는 백수도, 주부도 아니라, 작가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늦게 인정한 사람도, 결국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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