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야기, 열두번째날
오늘은 거창하게 비밀이야기라고 할 것도 없다. 아니, 남편에게는 말해도 모두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은 이야기다. 그야말로 폭주기관차였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를 하다 보면 이런 날도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 시점에 맞이하게 되어 좀 당황스럽다. 내 몸과 마음이지만 아직도 내가 온전히 다 알지 못한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때이다.
첫 끼니까지는 괜찮았다. 생각해 보면 첫끼 메뉴를 선정할 때부터 전조증상이 있었는데 깨닫지 못했다. 공복시간이 오래됐다 보니 배가 고픈 줄로만 알았다. 뭐든 다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메뉴 중에 자꾸 '피자'가 둥둥 떠다녔는데 가까스로 합의점을 찾아 햄버거를 먹었다. 지난번과 동일하게 코울슬로와 주니어 와퍼를 먹고 배부르게 잘 먹었다 했는데, 문제는 집에 들어오는 순간 터져 나왔다는 거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나는 며칠 굶은 하이에나처럼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치즈가 먹고 싶었다. 냉장고에 있는 냉동피자를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그러다 베이글을 꺼내어 에어프라이에 돌리고, 딸기잼과 땅콩잼을 꺼냈다. 베이글을 찢어 잼을 바르고 입에 넣기를 반복하던 나는 베이글이 반쯤 남자 눈이 돌았다. 기어코 냉동피자를 꺼내어 비닐을 찢고 한판을 통으로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남은 베이글을 먹어치웠다. 피자는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던 것 같다.
내가 그리던 피자는 치즈가 쭈욱 늘어나면서 입안에 고소한 맛이 착 감기고, 빵은 쫀득하면서 부드러워 토핑과 함께 어우러져서 맛의 향연을 펼쳐야 하는데. 치즈와 빵은 분리되고, 토핑이 올라간 부분은 부드러운데 끝은 딱딱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피자의 절반정도를 먹어치운 상태였다. 씁쓸한 마음으로 남은 피자를 정리한 나는 허탈함에 감자칩 한 봉지를 뜯어먹고, 육포를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배가 부르자 온전한 정신이 들었다.
다이어트를 해 본 사람은 알 수 있다. '나 다이어트를 할 거야, 식단을 기록하겠어!'하고 시작한 사람들이 폭식을 만나거나, 내게 떳떳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그 순간 사진 찍기를 멈추고 원점으로 모든 것을 돌린다는 것을.
그래서 저녁에 먹은 사진이 없었다. 정신을 놓고 먹었는데, 사진을 찍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아, 사진을 찍는 순간 눈이 돌아서 정신을 놓은 걸 수도 있겠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온전히 제정신이어서 저녁에 먹은 조합으로 사진을 찍어봤다. 아임베이글의 어니언 베이글을 먹었지만, 내가 하나를 먹어버려서 온전한 포장이 없으니 아직 개봉 전인 블루베리 베이글로 대체했다. 참고로 피자, 육포 모두 우유가 들어간다. 알면서도 제어가 안됐다. 아직까지는 큰 통증은 없지만 2-3일 내로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잘 지켜볼 생각이다. 그리고 2주 이내에 얼굴 트러블이 올라올 수도 있다. 우유를 지속적으로 먹으면 나는 염증 투성이가 되니까 잘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잘 살펴볼 건 내 마음이다. 미친 듯이 정신줄을 놓고 먹어버리는 경우, 보통 나의 우울이 터져 나올 때인데, 이번에는 '내가 우울하다'라는 사실을 포만감이 불쾌할 정도로 차올랐을 때 인지했다. 그리고 왜 우울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해도 내가 왜 우울한지 명확하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서운한 것이 중첩되어 어느 순간 그 사람에게 왜 화가 났는지도 모르고 이상한 걸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감정이라는 것이 빨간색, 파란색으로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빨간색, 파란색, 흰색, 검은색이 조금씩 섞여서 마치 하나의 색처럼 보이는 보라색이라는 우울로 표현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깨가 너무 아파서 생활이 너무 불편했을지도, 기껏 금요일에 휴가를 냈지만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정을 쳐내느라 온전히 쉬지 못한 게 슬펐을지도, 복잡한 가정환경을 먹먹하게 털어놓는 이에게 아무런 해결책도 내주지 못하는 마음이 답답했을지도, 이젠 너무나도 다른 너와 나가 되어버린 나의 오랜 친구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지 않은 오늘, 이 모든 일이 한 번에 일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주 잘 한 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오늘 기록을 마쳤다는 것이다. 도망치지도 않았고, 숨지도 않았으며, 내팽개치지도 않았다. 나는 응원해 주는 사람들을 믿고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믿음이, 그 기다림이 내겐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