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내면의 아이'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대학생 때 '유럽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며 동질감을 느꼈는데, 오늘의 주제인 바게트빵은 유럽여행을 떠올릴 때 빠질 수 없는 아이콘이다. 배낭에 바게트빵 하나를 꽂고 뜯어먹으며 게스트하우스에서 쪽잠을 자고, 빈대와 이를 이겨내면서 비용을 아껴 보다 많은 세상을 구경해 시야가 넓어졌다는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었던 탓인지, 바게트빵을 생각하면 배낭에 꽂혀 삐져나온 자르지 않은 온전한 형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는 유럽여행을 가본 적도, 배낭여행을 가본 적도 없다. 그리고 혹여 내가 앞으로 기회가 되어 유럽여행을 간다 할지라도 빈대와 이를 이겨내며 바게트빵을 뜯어먹을 생각도 없다.
이런 나는 한국에서 고3시절을 바게트빵과 함께 했는데, 어찌 보면 '바게트빵'은 역경과 고난을 견디게 해 준 소중한 음식이라는 의미로 일맥상통할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단과학원을 다녔다. 그 학원은 집에서 약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있었지만, 가격이 쌌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윤미래의 Memories를 무한 반복하면서 도착한 학원은 건조했다. 넘치는 사람들과 빼곡한 책걸상 그리고 먼지와 분필가루만이 가득했고, 감정은 모두 메말라있었다.
야자(야간자율학습) 대신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역에서 내리면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파리바게트가 있었다. 문 닫은 상가 사이에 노란 불빛이 '오늘도 고생했다'며 반겨주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매대에는 마감까지 팔리지 않은 빵들을 묶어 3천 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잘라진 바게트빵이 담긴 투명 비닐봉지가 있는 날이면 그걸 들고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빵을 뜯어먹었다. 치아 사이 질깃한 느낌을 이겨내면 입 안에서 단 맛이 느껴졌다. 그러면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멍하니 앉아 계속 빵을 먹었다.
그게 위로였다. 혼자 생계를 이어가느라 고생한 엄마와 술에 취한 아빠가 있는 반지하 집으로 들어가는 내 귀갓길을 위로하는 나의 방식이었다. 마실 것 하나 없이 팔리다 남은 빵을 사 먹는 것이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사치 중 하나였다. 어딘가 뒤틀려 있는 나의 중, 고등학교 생활에 그래도 가장 좋았던 순간을 꼽아보라고 하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친한 친구랑 멀어지고, 미쳐있던 동아리 생활에서 한 발자국 멀어지고, 학교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학원을 핑계로 야자를 빼먹었던 그때.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거리면서 미쳐있었던 그 나이. 그 시절을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바게트빵'이다.
이제는 감바스(스페인 새우 요리)를 만들어 오일로 바게트빵을 촉촉하게 적셔 따뜻한 새우랑 같이 먹는다. 팔리다 남은 바게트빵을 사는 것도 아니고, 바게트빵 하나를 꺼내어 '잘라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 먹지 않는다. 누군가와 같이 먹으니, 즐겁게 먹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됐다.
진창 속에서 살 때는 그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억겁의 시간이 지속되고,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 년 동안 바게트빵을 뜯어먹으면서 대학생이 된다고 삶이 나아질까,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벌면 더 나빠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상상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그 시기의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고 나니 찰나였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간 속에서 바게트빵 같은 아주 작은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지난한 삶일지언정 견뎌내니 건조한 빵이 부드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