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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roty Nov 21. 2024

유언

가을이 오면 폐부 깊이 숨을 들이마실 때, 가을 냄새가 느껴진다. 그러면 들숨에 기분이 좋아지면서 날숨에 불안을 느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지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계절도 가을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가을은 나에게 '이별의 계절'이었다. 가을이 되면 나쁜 일이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거야,라는 생각으로 가을을 무서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속절없이 찾아오는 이별의 순간에 두려움은 켜켜이 쌓여만 간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7주기가 됐다. 우리의 결혼도 7주년이 됐다.




아빠는 내가 결혼하고 3개월이 채 되지 않는 시점에 돌아가셨다. 웨딩사진 스냅 촬영한 건 언제 나오냐고 물으시다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일주일 후에 스냅사진 앨범이 도착했다. 아빠는 돌아가시고 나서 내 꿈에 나온 게 손에 꼽을 정도다.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다. 하루에 5-7시간을 자면서도 꿈을 2-3개는 꿀 정도로 꿈을 많이 꾸는 내게 아빠는 서운할 정도로 꿈에 안 나타난 것이다. 그런 아빠가 꿈에 나타났다. 


아빠는 꿈에서 동생의 부축을 받고 걸어야 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고, 그런 아빠를 동생이 챙기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아빠를 모셔다 드리고 동생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서 앉아 동생을 바라보는 꿈이었다. 되게 짧은 장면이었는데 잔상이 길었다. 아직도 그 식당 내관이 선명하다. 마침 이 꿈을 꾼 날 동생이 집에 와서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조카가 생긴 뒤로 동생과 단 둘이 만나는 게 어려웠는데 그런 소중한 날이었다. 동생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떠난 아빠가 유언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말을 남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어릴 적부터 강조하던 말이 있었는데, 왜 그동안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새로운 말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측했을까. 어릴 때부터 아빠는 엄마와 외출을 하고 우리 자매만 남게 되면 '선영아, 엄마랑 아빠가 없으면 네가 가장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동생이랑 싸우면 엄청 혼났다. 형제자매 간의 우애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빠가 그렇게 어린 시절 강조하던 이야기였는데,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기억 저편으로 넘겨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가 우리한테 마지막 말을 남겼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를 고민했다. 그 말은 이미 삶 속에 녹아있었던 말인데, 구태여 '결정적인 장면' 속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를 가장 괴롭힌 건 나였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지 못해 끊임없이 괴로워했던 터였는데, 그 질문은 '나 같은 딸을 낳고 아빠는 행복했을까?'였다.

나는 아빠에게 모질게 굴었고, 못되게 굴었다. 그 시절에는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히 나 자신을 합리화시킨 이기심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3주기 때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를 포기했지만, 5주기 때는 어렴풋이 답을 알 것도 같았다. 7주기가 된 지금은 내가 한 모든 행동을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행복했다'라고 말할 것 같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수 있기 때문일까. 


나이가 들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아빠의 행동과 생각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슬프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후회가 나를 사무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아빠와의 이별로 내가 아빠를 용서하게 되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훗날 아빠를 만났을 때 '그래도 덕분에 잘 살고 왔어'라고 말하려고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면 아빠는 '선영이 넌 항상 알아서 잘했지'라며 흐뭇하게 웃어줄 것 같다.


유언은 따로 없었던 이별이었지만, 아빠와의 시간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대로 답을 듣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아빠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꿈속에 찾아와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가면 되지 않을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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