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⑨질풍노도의 생레미 시절
과거를 떠나(革) 미래로 나아간(新) 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⑨질풍노도의 생레미 시절
#그림을 대하는 마음가짐
화가 인생 10년 중에서도 특히 생레미 시절, 나는 열과 성을 다해서 사랑으로 그림을 대했다. 평온과 광기, 온탕과 냉탕을 무시로 오가면서도 진한 애정으로 그림을 어루만지는 지극정성은 숨 쉬듯이 계속됐다. 내가 아를에서보다 건강 상태가 훨씬 좋지 않은 생레미에서도 거의 이틀 걸러 한 점씩 새로운 그림을 길어낼 수 있었던 기적 같은 창작 욕구도 모두 예술에 대한 숙연하고 진지한 마음가짐에서 나왔다.
생레미에 오기 전 아를과 최후의 정착지 오베르를 포함해 나는 10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제법 많은 그림을 그렸다. 제법, 이란 다소 거슬릴 수 있는 낱말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은 어림잡아 나흘에 1점씩 그린 예술혼과 모두 900점 언저리인 그림 수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한 가지 분명히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다작(多作)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에 못지않게 수작(秀作)을 남기기 위해 무지 애를 썼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 빠르면서도 더 멀리, 더 높이, 더 강하게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가혹하리만치 스스로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그림에 대한 존경심이 사무칠수록, 그에 비례해 나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렸다.
그런 점에서 나는 37년이라는 짧은 삶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 힘과 열정의 모든 것을 완전연소 시켰다. 지금 뒤돌아봐도, 내게서 아쉬움은 흔적조차 없다. 이런 내가 나는 자랑스럽다. 무한한 긍지와 보람에 즐거움과 행복감으로 환생 여행이 배가 부르다. 이만하면, 나는 잘살았다. 이제 사람들이 애틋하게 나를 바라보는 측은지심의 눈길도 그만, 거둬들이기를 바란다.
빈센트 반 고흐, 귀를 자른 뒤 그린 자화상, 캔버스에 유화, 60 x 49cm, 1889, 런던 코톨드 갤러리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아를에서 생레미로 넘어 가게 된 계기가 된, 엽기적인 사건을 저지른 뒤 그린 그림이다.
#폐쇄성이 오히려 약(藥)
나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감정의 속살을 드러낼 붓놀림 전술을 생레미 시절, 집중적으로 갈고 닦았다. 생레미에서는 1년간 머물렀다. 정신병원 입원은 자청한 일이었지만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사실상 감금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이라는 일념(一念)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가장 견디기 버겁고 고통스러웠던 점은 내가 그토록 좋아한 자연을 마음껏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생레미로 오기 전 내가 넋을 놓고 감상하기를 되풀이한 덕분에 기억에도 생생한 아를의 아름다운 풍경을 되살려 병실 안에서도 틈만 나면 붓을 들었다. 발작 증세가 수시로 출몰하곤 했으나 의사의 즉각적인 처방과 심리 치유에 힘입어 위험수위를 넘는 일은 없었다. 답답하기는 했지만 역시 입원은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보고 싶은 자연의 모습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던 폐쇄적인 환경이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나처럼 신경이 과민하고 발작기가 있는 사람은 본능적인 움직임에 익숙하다. 따지고 계산하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고, 즉흥적이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을 좋아한다. 원래 공간적 폐쇄성은 사람을 위축시키는 동시에 선천적인 반발 심리도 자극해 엉뚱한 발상을 부추기는 특성이 있다. 예술적 영감에 목말라하는 화가들, 특히 다양한 얼굴을 띤 감정이라는 마음의 울림을 가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승부수를 던진 나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 예술가 중에 의도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자처하거나 외골수가 드물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가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