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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n 25. 2021

빈센트 반 고흐의 환생(還生) 여행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⑦파리로 가다

과거를 떠나(미래로 나아간(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파리로 가다(1886년 2~1888년 2)     


#신천지가 가물거리다 

 파리는 신천지였다. 한가락 한다는 화가들이 넘쳐났고, 빛의 움직임에 도전한 인상주의 그림들이 널려 있었다. 고리타분한 기존의 회화 원리와 꼰대 같은 규범적 회화 법칙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온 나에게 파리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만난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감정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어 안달이 난 나의 운명은 빛의 변화를 포착하고자 한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집요한 관찰력과 인내심은 기본이요 끈기 있는 응시에서 길어 올린 섬광과 같은 울림을 재빠른 눈치와 손놀림으로 얼마나 실감 나게 붓질에 감정 이입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시시각각 모양을 달리하는 신출귀몰한 빛의 존재를 캔버스에 옮기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현장에서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붓 터치를 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빈센트 반 고흐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캔버스에 유화, 40.6 x 31.8cm, 1887-188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들은 빛의 영향을 받은 형태는 매번 달라진다는 점을 간파하고,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순간적인 모습은 으스러지듯, 흐리고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결과 인상파 그림에 나타난 물체의 정체는 엷게 문지르듯 희미하고 거친 붓질로 태어났다. 이런 붓놀림 때문에 형태의 공고성은 형해화(形骸化)됐지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뼈대는 그대로 살아 있어 우리는 화가가 묘사한 표적의 인상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즉 인상파 화가들은 보이는 것을 그리되, 눈에 들어오는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형태의 인상, 느낌을 그렸기 때문이다. 속이 꽉 차 여문 과일과는 정반대로 느슨하게 풀어져 그리다 만 것 같은 공허함이 밀려드는 형태의 불안정성, 이것이 인상파 화가들이 빛을 받아들이고 밀어낸 형태의 참모습이다. 

 

 훗날 조르주 쇠라와 같은 점묘파 화가들이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빛의 모습을 그리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실종된 형태의 단단한 성질을 복원시키는 진화된 인상주의 그림을 선보였지만, 인상파는 색감과 농도 조절, 형태의 인상 묘사를 위한 붓놀림 기술을 동원해 처음으로 빛의 움직임을 그렸다는 점에서 미술의 역사를 다시 쓴 혁신의 아이콘이라 불러 마땅하다.      


#고흐 화풍에 씨를 뿌리다

 나는 인상파 그림에서 찾아낸 이 같은 특징들을 내가 오매불망 기다려온 인간 감정의 시각화라는 일생일대의 승부에 접붙이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인상파 화가들처럼 색상 조율과 형태 표현에 필수적인 붓 터치 방식, 두 가지 전략을 어떻게 구체적인 전술로 현실화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회화의 세계로 끌어와 보이게끔 그리는 전술 말이다. 그것은 나와 색, 붓놀림이 하나가 될 때 가능할 터였다. 내 의식의 밑바닥에 고인 정서 덩어리를 물감과 붓을 놀리는 동작에 고스란히 실어 나를 수 있는 비법은 무엇일까? 이른바 고흐 화풍이 발아(發芽)되는 데에 실마리가 될 씨앗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장고(長考)를 거듭했지만 마땅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길을 나서 걸었다. 힘들고 외로울 때 나에게 유일한 벗이 되어준 자연이 보고 싶어서였다.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 강의 강물은 언제나처럼 나를 포근하게 감쌌다. 사시사철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는 도시 곳곳에 심어진 나무와 울긋불긋한 화초들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겼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            


조르주 쇠라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캔버스에 유채, 207.5 x 308cm, 1884-1886.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형태도색도 없는 감정을 눈앞에 호출하다

 감정에는 형태가 없어 잡을 수 없고, 형태가 없으니 색이 있을 리도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형태가 존재하지 않으니 실체적인 묘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듯이. 결국 감정 자체는 색도 없고 형태도 없는 인식의 차원이지만, 그림의 세계는 색과 형태가 어우러져야 형성된다는 근원적 조형미를 떠올렸다. 문제 해결에 한 걸음 다가섰다. 이제 감정의 색, 감정의 형태를 나만의 조형적 해법으로 창안해내야 한다. ‘나만의’ 해법이라는 말 안에는 ‘내 정신세계’가 개입되어 있기에 나는 이런 식의 주관식 답안을 작성했다.      


#감정의 색은 빛과 어두움에 달려 있다

 두려움과 외로움, 고독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을 움츠러들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사람이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 홀로 갇힐 때, 이런 감정은 살아서 움직이고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린다. 빛이 잠든 캄캄한 밤에 혼자서 공동묘지를 지날 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해 봤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반면 인파가 많고 빛이 살아 숨 쉬는 밝은 공간에서는 위협을 느끼거나 불안하고 무서운 공포심이 발호할 심리 기제가 제어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정신 상태에 이로운 심리가 작동될 가능성이 크다. 어둡고 외진 공간과 환하고 북적대는 공간은 화해할 수 없는 대척(對蹠) 관계다. 내가 발견해야 할 두 가지 전술 중 일단 하나, 감정을 색으로 증명하는 것은 이것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남은 것은 붓의 움직임에 조형미를 각인시켜 감정을 눈으로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가설(假說)을 하나 세웠다.       


#가설 설정 비정상적인 선율에서 영감을 얻다  

 평상심을 좌표축의 한 가운데 ‘0’이라고 가정한다면, 기쁘고 즐겁고 반갑고 행복한 마음은 양(陽)의 기운이 넘치니 ‘+’축에, 슬프고 힘겹고 두렵고 화나고 무서운 마음은 음(陰)의 힘이 드세니 ‘-’축에 놓일 것이다. 나아가 ‘+’축은 긍정적인 호르몬을 생성하는 들뜬 기운이, ‘-’축은 부정적인 호르몬을 생기게 하는 가라앉는 분위기가 지배한다는 귀납적 추리가 가능하다. 양쪽 축 다 평상심을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라 흥분지수가 정상 수치를 이탈했다고 할 수 있겠다. 


 감정의 맥박지수가 균형점, 즉 평상심을 탈출해 고공비행과 저공비행을 일삼아 우리 눈앞에 도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비정상적인 선율에서 답을 찾았다. 선율은 음악의 기본 요소 중 하나로 소리의 높낮이와 길이, 강약, 박자가 조화를 이룬 흐름이 아니던가. 나는 비정상적인 선율을 회화의 원리로 치환해 봤다. 셈을 해본 결과 철저하게 선(線)을 추종하는 붓 터치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의 길이와 굵기, 선이 지향하는 방향성, 선의 투박하고 거친 운동감이 뿜어내는 생동감이야말로 감정의 모양을 시각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최상의 처방임을 확신했다. 


빈센트 반 고흐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캔버스에 유화, 72 x 92cm, 1888,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오랜 세월 감정의 조형적 시각화와 씨름한 내 입에서 마침내 탄성이 터져 나왔다.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생레미~오베르 쉬르 와즈에 머무른 2년 5개월 동안 내가 죽을힘을 다해 캔버스에 투영한 400여 점의 그림들은 인간의 감정을 두 눈으로 정조준해 캐낸 빈센트 반 고흐의 성취다. 사람들은 그것을 표현주의라 명명했다지.              

 음악의 구성 요소, 선율을 회화의 시각으로 해석한 비정상적인 선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 개인적으로 ‘내 마음의 그림’을 꼽으라면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다. 내가 죽기 얼마 전에 그린 그림인데, 이 그림 속에 비정상적인 선율에 대한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금 뒤에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다. 기대해도 좋다.      

 

 타임머신에서 내려 계속된 도보여행의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몸이 천근만근이다. 왜 힘들게 도보여행이냐고? 뭐니 뭐니 해도 여행의 백미는 ‘걸어서 여행’ 아닌가. 더군다나 130년 만에 기적적으로 내생에서 현생으로 일시 귀환하는 행운을 거머쥔 나로서는 땅을 밟는다는 것 자체가 환생을 실감 나게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잠시 한숨을 돌린 뒤 태양의 고장 아를로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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