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보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책은 읽는 사람이 있을 때, 음악은 듣는 사람이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다. 내 비록 종교로 귀의하는 포부는 접었지만, 그림을 통해 사람, 아니 인류를 구원하겠노라.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원대한 나만의 이상(理想)은 1881년 초, 걸음마를 내디뎠다. 그림으로 세상을 비추고, 그림으로 나를 영원히 살게 할 빈센트 반 고흐의 진짜 인생은 이제부터다.
#그림은 나의 전부, 테오는 나의 전부의 전부
1881년 이후, 그림은 나의 전부였다. 그 전부를 전부로 가능하게 해준 것이 내 동생(테오)이니, 테오는 나의 전부의 전부다. 생전에 팔린 그림이라고는 딱 1점, 무일푼이었던 내가 생계 걱정 없이 그림만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테오 덕분이다. 물질적 지원뿐이 아니다. 테오는 내가 전업 화가로 들어앉기 훨씬 전부터 거의 20년 동안 나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신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림에 전념한 10년간 오간 서신에서 테오는 내게 마르지 않는 옹달샘처럼 번득이는 자극을 예술적 영감에 목말라 갈증이 날 때마다 제공한 은인 중의 은인이다.
덕분에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10년 동안 캔버스를 마주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도 캔버스는 늘 내 곁에 있었다. 캔버스를 펼쳐놓고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캔버스는 나의 놀이터요, 나의 일터이자 나의 보금자리였다. 아무도 몰라주는 응어리진 감정 보따리를 언제든지 마음이 가는 대로 풀어헤치고, 저 멀리 가물거려 잡을 수 없는 희망의 나래를 예술의 세계로 끌어와 활짝 펴게 한 곳도 캔버스였다. 모두 다 테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못 배운 게 오히려 덕
나에게 이런 말을 많이들 한다. 내가 대학을 나왔다면, 오히려 고흐답지 못했을 거라고. 고흐다운 게 어떤 거냐고 물었더니, 눈빛만 봐도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고독하고 가련한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거란다. 많이 배운 사람한테서는 질투심이 동정심을 밀어내 괜히 눈만 흘기게 된다며 배시시 웃었다.
알다시피, 내가 그림을 그린 시기는 10년간이다. 서른일곱까지 살았으니, 100살로 환산하면 27년. 내세울 경력이 못 된다. 변변한 학력도 없고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붓을 잡은 것도 스물일곱 여덟부터다. 그래서 미술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는 거장들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수사(修辭)는 나에게 낯설다.
빈센트 반 고흐, 붉은 베레모를 쓰고 있는 고갱, 황마(黃麻)에 유화, 37 x 33cm, 1888, 반 고흐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럼에도 뒤늦게 내가 그림의 세계로 뛰어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화랑에 근무할 때 자주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귀동냥으로흘려보내기에는 나처럼 못 배운 사람에게 인상이 깊었던 그 말은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미술은 영재교육이 별 의미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팔자소관인지, 나만의 짝사랑으로 끝난 고갱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고갱은 나보다 훨씬 늦은 서른 중반에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돌연 화가로 변신해 상징주의의 대가로 미술사를 빛냈으니까. 어쨌거나 고갱이나 나나, 둘 다 만학(晩學)에다 독학으로 이름을얻게 된 것을 보면 우리 둘이 음악이나 문학을 피해 미술을 선택한 점은 천운(天運)의 덕이라고 해도 되겠다.
#전반부 5년은 습작기
솔직히 내가 그림을 그린 세월이 10년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부 5년은 화가 흉내에 급급한, 어정쩡한 시절이었다. 그림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눈동냥, 귀동냥이 전부라 이 세계의 문화에 익숙해지는 게 급선무였던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내가 복잡한 미술이론이나 당대에 유행했던 예술사조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방끈이 짧아 그럴 수도 없었거니와 나는 오로지 내 가슴속에 화석처럼 새겨진 슬픔과 기쁨, 고독과 절망감과 같은 시신경이 포착할 수 없는 정서 탐구에만 관심이 있었다.
탐구의 구체적인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아 눈으로 볼 수 없는 원형질의 감정을 나만의 마음의 눈으로 읽어서 그림으로 보여줄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내가 화가가 되고자 결심한 근원적 이유이면서 그림을 매개로 나도 위로받고, 다른 사람도 위로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었다. 육안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의 세계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해석하는 그림에 이식하는 것, 그것만이 나의 목표였다.
전반부 5년은 나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습작 시기였다. 담금질 기간 내내 내 정신세계에 똬리를 틀고 있는 형형색색의 정서의 실체를 시각적으로 해체해 분석하고 그 결과를 회화 원리에 접목을 시켜 그림으로 발현시키는 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시기에 나는 네덜란드의 에덴과 헤이그, 드렌테, 누에넨에 이어 벨기에 북부 안트웨르펜을 전전하며 그림 공부에 전념했다. 1885년까지 나는 나처럼 소외되고 형편이 어려운 농민의 일상이나 노동자들의 삶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면 알겠지만, 그림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그림의 주인공인 하층민들의 고단한 하루하루를 가감 없이 전달하려다 보니, 저절로 음습한 색조와 초라하고 힘겨운 행색에 마음이 끌렸고 붓은 그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의 남루한 차림새와 힘겨운 노동에 찌든 겉모습을 사실 그대로 그리면서 나는 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들은 나였고, 나는 그들이었다. 내가 그들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숙명이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 붉은 후지산, 채색목판화, 1830년경, ⓒJim Breen's Ukiyo-E Gallery – Hokusai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8~19세기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거장 가쓰시카가 목판화로 제작한 후지산의 36경(景) 중 하나. 고흐와 인상파 화가들에게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
#우키요에(浮世繪, 부세회)와의 만남
이때 나는 인물화와 풍경화, 정물화 3대 장르에 매달렸고, 이 주제는 내 그림 인생이 끝날 때까지 지켜졌다. 전반부 5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당시 유럽 일대에 유행했던 일본의 채색판화인 우키요에에 매료됐다. 한자표기처럼 덧없는 세상을 표현한 그림이란 뜻의 우키요에는 에도시대(1603~1867) 때 성행한 서민풍속화다. 고급 기녀와 일본 전통 연극인 가부키 배우, 춘화(春畵) 등이 단골 주제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색감과 평면성, 파격적인 구도, 그림자가 없는 명암 표현 등이 특징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그리고자 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내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우키요에는 아를에 머무를 때 개화(開花)의 조짐을 보인 ‘고흐 화풍’이 뿌리내리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우키요에는 내 그림 인생의 또 다른 은인이다. 우키요에와 인상파 그림, 전반부가 넘어갈 즈음 나에게 주어진 두 가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미술상으로 일하던 테오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1886년 2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