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14. 대학 캠퍼스의 축소판 같았던 중학교 교정(校庭)

by 박인권

대학 캠퍼스의 축소판 같았던 중학교 교정(校庭)


#처음 본 중학교 교정 풍경

중학교 맞아? 대학교 캠퍼스에 온 것 같네.

아이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학식 때 둘러본 중학교 교정(校庭)은 생각보다 훨씬 넓어 깜짝 놀랐다. 동네 근처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 경기를 자주 한 내 머릿속 기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3년간 다니게 될 모교를 방문한 첫인상이 강렬했던 것은 곳곳에 펼쳐진 여러 채의 건물과 수려한 풍경, 학구적인 분위기에 이끌려서였다.


1906년에 개교한 오랜 역사와 전통에도 자긍심을 느꼈고 교정 전체를 감싸는 울창한 숲과 고색창연한 건물들, 50개의 계단으로 이어진 계단 길과 언덕길, 내리막길이 고즈넉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처음 본 교정은 마치 대학 캠퍼스를 축소해 놓은 것 같았고,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어우러진 언덕길과 내리막길을 걸어갈 때면 산들바람에 흥이나 취한듯 살랑대는 개나리와 느릅나무잎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개나리와 느릅나무는 모교의 교화(校花)와 교목(校木)이다.


#헨더슨 관, 애덤스 관, 맥퍼슨 관

교문(校門)을 지나자마자 계단 수가 50개라 50계단이라 불리는 계단 길이 나오고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등장하는 건물이 1931년에 지은 본관 건물 헨더슨 관이다. 입학하던 해에 건축한 지 40여 년이던 헨더슨 관은 이제 사람 나이로 졸수(卒壽, 90살)를 넘겼다.


본관 왼편으로 헨더슨 관의 아버지뻘 되는 영남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 애덤스 관이 있는데 설립자의 이름을 딴 모교의 상징적 건물이다. 1908년에 준공된 애덤스 관은 건물 벽면 전체가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어 고풍스럽고 운치 있는 아우라가 일품이다. 애덤스 관은 3 · 1 독립운동과도 인연이 깊은데 1919년 봄 지하 공간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복사 인쇄물을 찍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13년에 완공된 벽돌 2층 양옥인 맥퍼슨 관과 함께 세 건축물 모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유서 깊은 건물이다. 맥퍼슨 관은 내가 재학 중일 때는 제2 교사(校舍)로 사용되다 현재는 교내 교회와 컴퓨터실이 들어섰다고 들었다. 재학 중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세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오래된 건축물에서만 풍기는 세월의 무게를 몸소 체험하곤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성재관과 미니 축구 게임

중학교 1~3학년이 공부하는 총 30학급의 교실은 성재관이라 명명된 건물에 들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대구 직물업(織物業)의 거상(巨商) 김성재가 사재(私財)로 설립해 증축에 증축을 거친 4층 건물로 중학 시절 내 자취가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다. 바로 앞으로 운동장이 펼쳐져 있고 점심시간에는 정구공으로, 방과 후에는 축구공으로 미니 축구를 즐겼던 기억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간다.


정구공은 크기가 작은 데다 통통 튀는 반발력이 뛰어나 다루기가 까다로운 대신 볼을 소유해 드리블하거나 패스 능력을 키우기에 그만이라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정구공에 익숙해지는 감각을 익히고 나면 정식 축구공으로 경기할 때 몸놀림이 가벼웠고 다양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런 적도 있었다. 방과 후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핸드볼 골대를 사이에 두고 미니 축구 게임을 하던 중에 훈련에 한창인 고등학교 축구부 선수 한 명이 다가오더니, 야 딴 데 가서 해, 하면서 꿀밤을 한 대 먹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축구부 주장 이 모 선수였는데 지금은 축구 에이전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4,000여 명을 수용한 대강당과 대(大) 수양회

4,000명이 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전교생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과 유도 전용 체육관도 신기했고 미술과 음악 수업을 하는 예능관, 도서관, 어학실 등 독립된 건물로 이뤄진 시설도 다른 학교 학생들이 부러워할 만했다.


대강당에서는 중고 합동 전교(全校) 조회(朝會)와 연례행사인 대(大) 수양회(修養會)가 열렸다. 대 수양회는 1학기 봄, 중간고사 직전에 3일간 펼쳐졌는데 강당을 빼곡히 메운 틈바구니에서도 눈치껏 과목별 요약 노트를 보거나 영어 단어장을 외우는 학구파들도 있었다.


대 수양회 동안 대강당 안은 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은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땀 냄새에 더해 신발 위에 덧씌운 퀴퀴한 덧신 냄새가 범벅이 되어 코를 괴롭혔는데도 다 들 잘도 견디어 냈다.


#모교의 자랑, 교사 연구실

학교 시설 중에서도 특히 학생들의 눈길을 끈 게 있었는데 국내 중등학교에서는 거의 유일한 교사 연구실의 존재였다. 연구실은 교사들의 독립된 개인 연구 공간으로 채워진 3층 건물로 모교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시설이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 한 명과 학급 업무를 돕느라 담임 선생의 연구실을 처음 가봤는데 책장과 책상, 탁자, 침상까지 놓여 있는 시설에 적잖이 놀랐었다.


대학 교수 연구실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교사 홀로 학습 교재 연구와 시험 문제 출제, 교무 행정은 물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라 다른 학교 교사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강 이남에서 규모가 가장 큰 중등학교인 모교를 졸업한 지 46년째를 맞아 되돌아본 중학교에 대한 단상(斷想)을 정리하다 보니 동요 ‘오빠 생각’으로 유명한 박태준(1900~1986) 선생이 작사한 교가(校歌)의 첫 구절이 아른거린다.


앞에 섰는 것 비슬산이요, 뒤에는 팔공산 둘렀다~

이전 13화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