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어묵탕
38. 어묵탕
#어묵탕의 계절
역대급으로 더웠던 9월이 엊그제 같건만 거짓말처럼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가 먼발치에서 들려오고 있다. 가을의 청량한 기운을 채 느끼기도 전에 밤의 인기척이 점점 빠르게 다가와 절기(節氣)의 냉혹함을 실감한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이 열흘 남짓 앞이고 아침저녁으로 하루가 다르게 쌀쌀한 날씨에 몸이 움츠러든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낭만적 감상에 젖을라치면 어느새 훌쩍 떠나버리는 가을이 야속하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일몰(日沒) 풍경이 일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밤의 시간도 더디게 흘러간다. 스산한 날씨가 활개를 치는 밤이 이슥해지고 초저녁에 뜬 밥술의 기운이 풀어질 때쯤이면 입맛을 다시게 하는 음식이 있다. 뜨끈한 국물이 한기(寒氣)를 녹이는데 그만이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에도 손색이 없는 어묵탕이다.
어묵탕은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육수에 모양과 크기와 빛깔이 제각각인 모둠 어묵과 큼지막하게 썬 무, 대파를 넣고 끓여 후추를 쳐서 먹는 탐스러운 먹거리다. 달고 시원하고 짭조름하고 구수한 국물 맛에 풍만한 어묵 살을 베먹는 맛이 그만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을 지나 긴 겨울밤이 끝날 때까지 밤참으로 이만한 먹거리가 또 있을까. 추운 겨울밤을 견디게 하는 든든한 위로의 음식이자 간식거리인 어묵탕, 어묵의 역사는 오래됐다.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고 빛깔도 예쁜 모둠 어묵
#어묵의 역사
어묵은 생선 살을 으깨 갈아 소금과 전분 따위를 섞은 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빚고 쪄서 익힌 음식이다. 물고기 살에 소금을 넣고 찌거나 익히거나 구워서 굳히면 탱탱하게 탄력이 넘친다. 어묵은 바로 그런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어묵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중국, 홍콩, 유럽 등에서도 존재하는 광범위한 음식이다. 나라마다 만드는 제조법이 조금씩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기본 재료는 모두 생선 살이다.
어묵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중국 진나라의 초대 황제 진시황(BC 259~BC 210, 재위 BC 247~BC 210) 때라는 주장이 있다. 으깬 생선 살을 밤톨 크기의 구슬 모양으로 동그랗게 빚어 삶은 경단(瓊團) 형태의 어환(魚丸)이 최초의 어묵이라는 것이다. 생선 가시를 극도로 싫어한 진시황을 위해 황실 요리사가 목숨을 걸고 다양한 실험 끝에 개발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어묵을 어환이라 부른다.
멸치와 다시마, 무를 넣고 육수를 끓인다.
어묵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요리책인 소문사설(謏聞事說)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일본의 생선 어묵인 카마보코(かまぼこ)를 일본식 발음 그대로 한자로 표기한 가마보곶(可麻甫串)이라는 요리가 소개돼 있다. 제조법이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일본 어묵과는 달라 조선 시대 음식 예법에 맞춰 재해석한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오늘날의 어묵과는 너무 달라 어묵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사료적 가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소문사설은 조선의 역관(譯官)이었던 이표(李杓)가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 시대인 174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무가 익을 때쯤 어묵과 다진 마늘, 대파를 넣고 국간장 한 큰술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우리나라 어묵의 시초(始初)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어묵의 시초는 일본 어묵에서 비롯됐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어묵이 유입돼 한국식으로 정착한 것이다. 일본 어묵은 만드는 법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나 통칭 카마보코라 한다. 세부적인 명칭은 찌는 방식은 카마보코, 가고시마 지역에서 유래된 튀기는 방식은 사츠마아게, 생선 살을 막대기에 발라 굽는 방식은 치쿠와, 삶는 방식은 한펜이다.
일본 어묵의 역사는 중세 무인(武人) 정권인 무로마치 막부(1336~1573)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으깬 생선 살을 대나무로 만든 꼬챙이에 꿰어 구운 것에서 출발해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했다. 국립국어원 발행 표준국어대사전에 규정된 어묵의 정의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생선의 살을 으깨어 소금 따위의 부재료를 넣고 익혀서 응고시킨 음식. 원래 일본 음식으로서 으깬 생선 살을 대꼬챙이에 덧발라 구운 데서 비롯하였으며, 나무판에 올려 찌거나 기름에 튀겨서 만들기도 한다.’
중 약불에서 계속 끓인 뒤 청양고추 한 개를 썰어 넣는다.
#어묵과 오뎅
어묵이라는 명칭이 표준어로 등재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용된 어묵의 속명(俗名)은 오뎅(おでん)이었다. 일본에서 오뎅은 꼬치용 어묵과 무, 곤약(菎蒻) 따위를 넣고 끓인 탕(湯) 요리를 말하나 우리나라에서는 개별 어묵 하나하나를 지칭한다. 오뎅이라는 일본어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어묵과 동일시하는 바람에 그 의미가 변용된 언어적 관습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어묵이라는 표준어로 통일되기 전까지 어묵탕의 이름도 오뎅탕이었다. 이런 배경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오뎅과 어묵이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곤약은 감자처럼 생긴 구약(蒟蒻) 감자에 첨가제를 섞어 끓이고 익혀서 식힌 뒤 굳힌 묵이다. 젤리처럼 물컹물컹하면서 쫀득쫀득하고 단맛이 난다. 우리나라의 어묵탕에 해당하는 일본식 오뎅에 꼭 들어가는 식재료다.
내가 어렸을 때 어묵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없었고 오뎅이라는 말만 존재했다. 고향집 안방과 작은방 윗목에 오싹한 기운이 내려앉는 겨울밤이면 오뎅탕, 즉 어묵탕은 형들과 내가 즐겨 먹은 훌륭한 야식이었다. 그때의 어묵은 길쭉한 타원형이었다. 여러 개의 어묵을 넣은 어묵탕은 오래 끓일수록 국물 맛이 개운해 속이 풀렸고 어묵의 몸집도 두툼하게 부풀어 올라 식욕을 돋웠다.
어묵의 몸집이 부풀어 오르고 충분히 익었을 때 후추를 치고 불을 끈다.
#어묵과 길거리 포장마차
젓가락으로 어묵 몸 가운데를 꾹 찔러 양념간장에 찍어 한 입 먹으면 형제들 모두 비교 불가의 맛에 행복해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어묵은 어른, 아이 모두 다 좋아한 만인(萬人)의 음식이었다. 해거름 녘, 고향집으로 들어가는 동네 어귀에 백열전구로 빛을 밝힌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아이들은 군것질거리로 어묵을 먹었고 어른들은 막소주 한잔에 어묵을 안주 삼아 고단한 하루를 달랬다.
긴 대나무 꼬치에 꽂아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어묵이 1970~80년대 초에 먹었던 어묵과 비슷한데 국물 맛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묵을 길거리 음식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모둠 어묵은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고 빛깔도 예쁘다. 네모반듯한 정사각형 어묵,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 어묵, 속이 빈 원통형 어묵, 동글납작한 어묵, 경단 모양의 어묵 등이 그러한데 밤참으로 먹어도 맛있고 식사 대용(代用)으로 먹어도 부족함이 없다. 어묵탕이 그리운 계절이 돌아왔다.
어묵탕 한 그릇이면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어묵탕
1. 물을 부은 뒤 멸치와 다시마, 무를 넣고 육수를 끓인다. 무는 큼지막하게 썬다. 잘게 썬 무보다 크게 썬 무를 넣고 우려낸 육수가 더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난다.
2. 육수가 비등점을 돌파하면 다시마를 건져내고 무가 부드럽게 익을 때까지 중불에서 계속 끓인다. 어묵탕의 무는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익힐수록 육수의 맛이 확장된다.
2. 멸치도 건져내고 어묵과 다진 마늘, 대파를 넣은 뒤 센 불로 끓이다가 육수가 넘치겠다 싶으면 다시 중 · 약불로 낮춘다.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매콤한 국물을 좋아한다면 청양고추 한 개도 썰어 넣는다.
3. 어묵의 몸집이 먹음직스럽게 부풀어 오르고 충분히 익었을 때 후추를 몇 번 친 뒤 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