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샘 Mar 01. 2023

질긴 인연의 끈

#20일 차, 나의 운명, 나의 행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생장에서 한국인을 아무도 만나지 못해 이들과 함께 걷게 되었지만 이것이 나의 운명이며, 나의 행운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동 : Bercianos del real camino --> Mansilla de las mulas





일어나니 6시 10분.

매일 밤잠을 설치긴 하지만 그런대로 잘 자는 편이라 생각한다.


늘 알제르게에는 코를 고는 사람들이 있고 2층 침대이기 때문에 아래층에서 몸을 뒤척이던가 위층에서 몸을 뒤척이던가 하면 침대가 흔들린다.

그럼 또 잠이 깨곤 한다.

그렇지만 깼다가 또다시 잠을 잔다.

그렇게 몇 번 잠을 뒤척이다 보면 아침이다.

만약 집이라면, 아니면 더 쉬어도 되는 곳이라면 늦잠을 자고 싶겠지만, 늘 힘들게라도 일어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짐을 챙겨서 나오면 거의 30-40분이 걸리는 것 같다.

늘 캐시가 가장 먼저 짐을 챙기고 그다음 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잔이 짐을 챙긴다.

캐시가 먼저 일어나기도 하지만 잔이 매일 아침 물집치료를 위해 밴드 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제 알베르게는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데 나이 드신 남자 두 분(신부님인 것 같았다)이 접대를 하였다. 

알베르게 벽에는 그곳의 하루 프로그램이 붙여져 있었는데, 아침 먹는 시간, 저녁 먹는 시간 그리고 잠자는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 알베르게에서 운영되는 도네이션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아침, 저녁까지 제공해 주며 모든 것이 도네이션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도 오늘 아침은 알베르게에서 먹었다. 주스와 시리얼, 잼과 버터, 초콜릿 잼, 쿠키 그리고 각종 티와 따뜻한 커피와 우유까지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었다. 맛있게 먹고 기쁜 마음으로 기부를 했다.

앞으로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면서 저녁과 아침을 주는 알베르게에 가게 되면 그곳 프로그램을 따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감사했다. 

오늘 아침 알베르게를 떠나오는 데 또 현관 앞까지 나오셔서 부엔 까미노라며 악수를 해주셨다. 참으로 감사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첫 타운에서 커피를 마셨다.


잔이 독일에서 온 에바라는 아줌마와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다. 원래 잔은 역사와 국가적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지라 또 그녀와 계속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우리들은 에바와 계속 함께 걸었다. 에바도 사실 오며 가며 많이 마주쳤고 인사를 했던 분이다. 

잔이 우리보다 앞서 걷다가 에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잔 하고 에바 모두 서로에게 호감이 갔던 모양이다. 잔이 우리들을 소개해 주었고, 에바는 우리가 일행으로 함께 걷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라며, 부럽다고 했다. 그녀는 작년에 10일을 걸었고, 올해 또 부르고스부터 10일 정도를 예정하고 걷고 있는 중이라 했다. 실제 나이는 67세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더 들어 보여서 조금 놀라긴 했다. 




점점 걷는 것이 편해지고 있다. 

물집이 한 번도 생기지 않은 내 발을 보고 캐시가 ‘미라큘러스 핏’이라고 해서, 또 한참 웃었다.


많이 걸으면 어깨가 아프긴 하지만 참을 만하다.

때문에 오늘은 맨 앞에서 걸은 적도 많았다.


에바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한국인들이 까미노에 많이 오는지, 

왜 한국의 학생들이 독일로 음악공부를 하러 많이 오는지…….


난 한국인 기자가 까미노를 다녀온 후 그 이야기가 유명해졌고 이후 그녀가 제주도에 까미노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나도 음악을 좋아하고 아마도 독일이 음악 하는 분위기와 환경도 좋고 대단한 음악가들이 많아서 그곳에 많이 공부하러 가는 것 같다고 대답해 주었다.




오늘 또 한국인 2명을 만났다. 나보다 늦게 생장에서 출발했는데 같은 장소에 있는 걸 보니 다들 나보다 빨리 걷는 것 같다. 만약, 나의 목표가 오로지 걷는 것에 있고, 또 빨리 걷는 것에 있었다면 나도 좀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나는 잔과 캐시와 함께 천천히 걷는 것에 만족한다.


사실 요즘 캐시가 빨리 걷기 힘들고, 그래서 많이 기다리고 또 많이 쉬기도 하지만, 

그래서 내 페이스가 아닌 그녀의 페이스에 맞추어야 하지만, 난 좋다. 

이제, 난 우리들이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또 그래야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것도 생기고 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질긴 인연의 끈으로 묶여있는 것 같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따로 와서 만나면 한국인들끼리 함께 걷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생장에서 한국인을 아무도 만나지 못해 이들과 함께 걷게 되었지만 이것이 나의 운명이며, 나의 행운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제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기계적으로 샤워할 준비를 하고 샤워 후 빨래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



이곳 알베르게에서 또 유리를 만났다.

오늘은 잔과 캐시 그리고 유리와 에바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2015년 9월 9일, 만시야 데 라스 무라스에서


이전 02화 내 친구, 음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