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차, 우리들의 해방구, 레옹
감동이기도 했고, 뭔가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오늘 나는 꼭 리본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간절하면 하늘에서 그때를 알려주는 것일까?
사실 오늘은 레옹 가는 날이라는 부푼 기대감이 있었다.
그래서 발걸음도 가벼웠다.
이제 레옹만 지나면 큰 대도시들은 거의 지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큰 도시가 산티아고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거의 다 걸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우린 지난번 부르고스에 도착할 때처럼,
레옹을 그리며, 레옹을 외치며, 드디어 레옹에 도착했다.
중간에 도미니크를 다시 만났다. 얼마나 다행인지…….
왠지 모르게 도미니크가 우리와 함께 끝까지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좀 챙겨주고 싶다.
프랑스 아주머니들을 다시 만났다.
이들 프랑스 아주머니들 셋은 친구 사이인 것 같은데, 오며 가며 인사를 해서 아주 익숙하다.
며칠 전 세 분이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찍어줄까요?" 하고 말을 걸었더니, 무척 고마워했다. 그리고 내가 달고 다니는 노란 리본 목걸이에 관심을 보였다. 유방암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고……. 그분들이 영어를 잘 못해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만나면 불어로 이야기해 주어야지 하며, 마음속으로 열심히 불어 문법을 떠올리며 준비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오늘 만난 것이다.
잘 되지 않는 프랑스어로 '다시 만나서 기쁘다. 내 노란 리본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선물로 주고 싶다. 이 리본은 유방암을 의미하는 것 외에도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작년에 한국에서 슬픈 사고가 일어났는데, 이후 사고 희생자를 기억하고, 우리나라가 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리본을 만들었다. 이 리본은 그러한 바람과 평화의 상징이다.' 라며 건네주었더니 고마워했다.
좀 더 걷다가, 그분들 중 유난히 천천히 걷는 아줌마를 다시 만났다.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다시 만난 김에, 아까 말한 거 이해하냐고 했더니 잘 이해했단다. 그러면서 오늘이 자신이 걷는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
작년에 프랑스에서 생장까지 걷고, 이번 연도에 생장에서 레옹까지 걷는 것이 목표이며,
내년에 레옹에서 산티아고까지 걸을 예정이란다.
그러면서 정말 고맙다고 앞으로 끝까지 잘 걷길 바란다면서 프랑스식 인사로 내 앞길을 기도해 주고 싶다 했다. 그리고는 내 양 볼에 입을 맞추는 프랑스식 작별인사를 해 주었다.
감동이기도 했고, 뭔가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오늘 나는 꼭 리본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간절하면 하늘에서 그때를 알려주는 것일까?
아주머니의 이름은 Suzy(쒸지).
이후, 한 번 더 쒸지를 만나고 싶었으나 만나지 못했다.
아마, 그녀는 오늘 레옹에 도착해서 프랑스로 돌아가는 교통편을 구했을 것이다.
감사와 감동은 그렇게 내게 자주 찾아왔다.
레옹에 도착해서는 도미니크에게 생일이니 함께 맛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지난번에 도미니크와 나탈리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도미니크가 곧 자기의 생일이 돌아온다고 했었다.
내가 생일 기념으로 아이스크림을 쏘겠다고 했다.
우리들은 맛난 아이스크림을 먹고 대성당을 구경하며 레옹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뭐랄까 오늘의 레옹은 우리들의 해방구 같았다.
저녁을 먹은 후 잠시 바람도 쐴 겸 혼자 플라자에 나와 봤더니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그곳의 경찰들로 구성된 관현악단이었는데, 그날이 마침 그들의 작은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나 보다.
음악회가 끝나고 갑자기 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아이스크림을 하나 들고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젊은이가 또 걸어오고 있었다.
잔이었다.
잔도 음악소리가 들려, 그렇게 플라자로 나와 음악을 들었단다.
플라자 건너편에 큰 건물이 있어 시청인가 했더니 경찰서란다.
경찰서가 왜 그렇게 큰지 모르겠다고, 한국의 경찰서는 저렇게 크지 않다고 했더니, 아마도 한국은 범죄자가 별로 없어서가 아니겠냐고 한다.^^ 그럼 스페인은 범죄자기 많아서 그러냐니까 그렇단다.
슬로베니아는 어떠냐니까 훨씬 더 크다고 한다. 우리들은 또 한바탕 웃었다.
그러다가 작은 갤러리를 구경하고 이어 예술이야기가 나왔다.
모던예술을 좋아하냐고 해서 아니라고 하니, 잔은 자기는 모던예술은 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던미술도 모던음악도.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바그너이야기가 나왔고 이어 히틀러가 바그너를 좋아했다는 사실, 나아가 독재자들이 예술과 문화를 이용했다는 사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옹의 밤을 우린 그렇게 보냈다.
2015년 9월 10일 레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