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샘 Mar 02. 2023

내 안의 나는 생각보다 강했다

#22일 차, 새로운 그룹과의 식사

우리는 살면서 뭔가를 계획하지만,
의도치 않게 다른 과정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린 또 다른 만남과 다른 인연들을 경험할 것이고,
어쩌면, 이미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


이동 : Leon --> Villar des mazarif





레옹에서 걷는 길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원래 우리는 우회로가 아닌 직진을 선택한 후 시간이 되면 좀 더 걸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어디에서 길을 잘 못 들었는지 우리는 우회로를 선택하게 되었고 ,

결국은 우회로를 선택하면서 현재의 타운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면 좀 더 걸으려 해도 알베르게가 다음 타운에는 없으므로.

다음 알베르게까지는 10km를 더 걸어야 하기 때문에.


까미노 길은 대부분 하나의 길로 되어있지만, 간혹 이렇게 몇 개의 우회로를 가진 길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나 다시 소도시나 대도시에서 만나곤 한다.

지난번에 우회로를 걸으며 기진맥진했던 경험이 있던 터라, 오늘 우리는 절대로 우회로를 가지 말자고 했건만 중간에 어느 곳에선가 길을 헤맨 후 우린 이렇게 우회로로 접어들었고, 

이 우회로는 꽤 길어 각기 다른 길로 들어선 순례자들이 오늘 만날 일은 없었다. 

내일도 우회로가 있으니, 아마도 오늘 누군가 각기 다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면 며칠이 지나야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뭔가를 계획하지만,

의도치 않게 다른 과정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린 또 다른 만남과 다른 인연들을 경험할 것이고,

어쩌면, 이미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


오늘은 에바와 도미니크와 함께 길을 걸었다. 에바는 독일출신인데 영어를 아주 쉽게 말해 준다. 점점 에바와 이야기 나누는 것이 편안하고 좋다. 노란 리본을 주면서 의미를 설명해 주었더니 충분히 이해하는 듯했고, 참 좋은 선물을 가져왔다면서 고마워했다



그동안 도네이션으로 운영하는 간이카페에는 잘 가지 않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에바가 잠깐 쉬면서 오렌지주스나 마시자고 해서 함께 쉬게 되었고, 

그냥 스탬프를 찍어준다고 해서 주인에서 갔더니,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이라고. 그리고 "감사합니다."라고.

고마웠다. 그래서 함께 사진을 찍고는 "사랑합니다." 도 알려주었다.


걷다가 스페인 사람들이 날 보면 바로 한국인이 아니냐고 물어오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면서 최고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같은 한국말을 들려준다.

이곳 까미노에 한국인들이 많이 다녀갔다더니, 그 혜택을 내가 받는 것 같다.




오늘 저녁은 혼자 먹겠다고 선언했다.

늘 사 먹는 것보다 한 번쯤 해 먹는 것도 괜찮게 생각되어서.

알베르게에 들어와 보니, 한국인이 2명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는 컵라면과 샐러드를 슈퍼에서 사 왔다.

근데, 어쩌다 보니 나 혼자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 한국인 분들이 이후에 보이지 않았다.


알베르게의 야외 탁자에 앉아 라면을 꺼내 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한 미국인 여자가 같이 앉아도 되냐고 한다. 

잘 되었다 싶었다. 


친구들이 다 밖으로 나간 터라, 덩그러니 혼자 먹어야 할 판이었는데, 함께 식사를 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알베르게에서 파는 필그림메뉴를 주문한다. 


내가 내 먹을 거를 먹으면서 함께 앉아도 되냐고 하니 상관없단다.

그리고 옆 테이블에는 늘 오며 가며 인사하던 그룹이 앉아있었다. 




이 그룹에는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 둘 그리고 젊은 남자 한 명이 거의 늘 함께 걷는 그룹이었다. 

카페에서 쉬려고 하면 이따금씩 만나기 때문에 매우 익숙하게 인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혼자 밥을 먹으니 어쩐 일이냐고 해서, 오늘은 그저 라면이 먹고 싶었다고 했다.

뭐 갑자기 '같이 먹을까요?'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그렇게 우리는 7명이 모였다. 

서로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이름이 뭔지를 이야기했지만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근데, 알고 보니 그들도 이곳 까마니에 와서 그룹이 된 친구들이란다.


덴마크에서 온 여자 학생, 독일에서 온 남학생, 캐나다에서 온 중년의 남자 마르크, 

그리고 미국인 여자 맥, 또 다른 나이 많은 할아버지 마이클 그리고 의사인 엘리자베스.

이렇게 모여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닥터아줌마가 분위기를 이끌었고, 나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 제주올레가 있는 거며, 며칠 전 알베르게에서 감동받았던 이야기며, 

까미노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경험이라는 이야기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란 리본과 내가 대안학교 교사란 이야기까지. 


그러고 나니 캐나다 아저씨가 자기도 비슷한 학교 선생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앨 시스테마 같은 음악학교의 교사라고. 

그러다가 앨 시스테마 이야기도 나왔고,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들은 한국에 그런 까미노가 있는 줄 몰랐다면서, 내년에는 제주올레에서 만나자고 해서 모두들 또 즐겁게 한바탕 웃었다.




하지만 그러한 식사분위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모두들 필그림 메뉴를 먹고 나 혼자만 컵라면을 먹는.

하지만 나 혼자만 이상함을 느꼈을 뿐, 

주문을 받는 종업원이나 함께 식사를 한 사람들이나 정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다른 방식에 대해 관심 주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인정해 주는 그들의 문화가 날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아무튼 난 나 혼자 아시안이기에 어색하기만 한 순간순간들을 이렇게 두꺼운 얼굴로 극복해 가고 중이다.


내 안의 나는 생각보다 강했다…….



2015년 9월 11일, 비야르 데 마자리프에서


이전 04화 잘 가요, 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