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영화
나는 영화를 왜 좋아하는가.
어느 시기까지는 별 생각없이 즐겼었다. 재밌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엔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지만, 꽤 많은 시간을 영화보는데 할애하는 내가 왜 영화를 좋아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일은 영화를 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영화를 왜 보고, 왜 좋아하는가. 이 글은 시작에 대한 이야기다.
중학교 때 기억이다. 집과 50걸음 거리에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참고서 살 돈 만원을 받으면 거스름돈으로 영화보는데 꽤 많이 썼던 것 같다. 너무 자주 갔던 탓에 사장님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등급의 영화도 가끔 빌려주었다. 대부분 액션/스릴러 장르였고, 사장님이 허락한 것 또한 수위가 조금 더 강한 액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손에 든 검은 비닐 봉지 안에는 비디오 테이프 뿐만 아니라 어떤 자부심도 함께 들어있었다.
20대의 영화는 성격이 좀 달랐다. 영화를 좀 보다보니 불현듯 꿈도 가지게 됐다. 나도 영화를 만들어봐야지라는 생각을 강하게 했던 시기였고, 그 생각을 핑계로 스리슬쩍 현실의 문제들을 도외시한 방황의 계절이 아니었나 싶다. 솔직히 말하면 복합적이라 할 수 있겠다. 현실도피의 한 방편이기도 했고, 동경 혹은 미래의 종착지라는 애정어린 시선도 담겨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뭘 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지금 나에게 영화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고상한 도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경험도 마찬가지다. 울적할 때 웃긴 영화를 보고 마음을 풀기도 하고, 첨예한 윤리를 다룬 영화를 보고 앞으로의 삶도 생각해보는 기회를 얻는다. 10대는 마냥 좋았던 매혹의 시기였다면, 20대 때의 관계는 애증이었고, 지금의 나와 영화와의 관계는 안정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영화에 대한 나의 마음 혹은 관계를 이야기할 때 앞서 말한 것들보다 가장 먼저 꺼내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기억이 있다.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억지로 이끌어낸 과장된 기억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잊혀지지 않기에 이야기해본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기때문에 놀거리가 흙장난, 물놀이 말고는 TV 밖에 없었다. 그조차 오후 늦게 시작했고, 볼거리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별미는 주말의 명화와 같은 영화프로그램이었다. 어떤 영화를 봤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오프닝만큼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비디오플레이어가 보급이 됐다. 10살 정도 됐을거다. 아주 작은 마을이라 학교에 먼저 들어왔는데, 어느날 학교가 파한 오후에 선생님이 관사로 우리를 불러모았다. 전교생이 10명도 안됐기에 작은 방에 옹기종기 둘러앉아도 넉넉했다. 커튼을 치고, 자막과 함께 재생되는 인디아나존스:최후의 성전을 보기 시작했다. 집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늦은 저녁이 아니었고,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였다.
사실 명확하게 말하면 ‘함께’ 영화를 본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공간, 다른 분위기에서 평소 보던 영화를 색다르게 경험한 사건이었다. 같은 영화를 봐도 집에서 보는 것과 개봉관이 적어 찾아찾아 들어간 작은 극장에서 마주하는 경우와의 온도차이 상당할거다. 돌이켜보면 그런 맥락이었다고 본다. 보물을 찾으러 다니지만 그에 비해 소박한 주인공의 신념, 애틋한 가족애, 권선징악이 인디아나존스의 미덕이긴 하지만, 탱크와 싸우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줄 알았던 해리슨 포드가 아버지인 숀 코너리를 놀래키는 장면이나, 점잖은 노교수 숀 코너리가 따라오던 오토바이를 우산으로 전복시킨 장면, 같은 편인 줄 알았던 미모의 조력자가 실은 나치였다는 사실은 그 분위기 때문에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그런 방식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고, 그 처음이 주는 설렘과, 그로 인한 집중, 그로부터 온 매혹, 마지막으로 이 모든 상황으로부터 난 영화에 매료됐다. 10살, 나른한 오후의 인디아나존스는 영화에 대한 나의 원초적 본능이 각인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이 기억이 영화를 향한 내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를 계속 보는 이유에 여러 사족을 붙였지만, 이 때의 느낌을 되살리고 싶은 순수한 열망의 발로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