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켄 로치의 미학
켄 로치 감독은 주로 노동자 계급이나 하층민의 삶을 다룬다. 사실주의에 입각해 인물이나 상황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영화 속 주인공들은 처절하며 안쓰럽다. 대게 비극인데,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비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를 막론하고 미학이라고 할 때 흔히 창작자의 독특한 문법이나 시각적 요소 등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켄 로치의 작품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사실주의적이라 이야기는 정직하고 카메라 또한 묵묵하다. 거대한 스케일도 없으며 그렇다고 시적이지도 않고, 시각적으로 새로움이라고 할 게 없다. 굳이 미의 기준을 이런 스타일에 국한시킨다면 말이다.
세어보니 그의 작품을 7개 봤다. 초기작은 많이 못 봤고, 최근작들은 거의 다 봤다. 보면서 느낀 점은 쉽다는 것. 직관적이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가 훤하게 보인다.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어필해야 하는 TV에서부터 출발해서 그런지 영화적 기교랄 게 거의 없다. 그렇다면 쉽다는 것이 미학이 될 수 있을까? 다른 감독에게 통할 런지는 몰라도 켄 로치에게는 유효할 듯싶다.
앞서 말했지만 켄 로치는 노동자나 소외된 계층의 삶을 다룬다. 현실의 사회 구성원 중 절대다수다. 그들 중 어떤 스타일을 구사하든 척하면 척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더 빨리, 많이 가닿을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고 본다. 광장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달할 때 간단명료한 구호를 외치는 것과 시를 읊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가를 생각해보면 켄 로치의 방법론이 이해가 된다. 특히 가장 최근에 나온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같은 경우 각각 소외 계층(노인, 싱글맘)의 빈곤과 플랫폼 노동자에 대해 다룬다. 보고 있으면 마치 설명서를 보는 듯하다. 미안해요 리키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자의 삶을 차근차근하게 보여주는데 마치 교육자료 같다. 은유나 상징 또는 비비 꼬아서 어렵게 만들지 않는 건 그들의 삶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힘듦이나 어려움을 치장하지 않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그들의 삶을 다루는 것이 켄 로치의 미학이 아닐까 싶다.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해서 동호회를 들었던 적이 있다. 자주 나가다가 중립국을 하게 되면서 주말을 빼지 못해 아쉽게도 그만뒀는데, 전시를 보고 뒤풀이를 하기도 했다. 그때 한 얘기 중 하나가 작품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쉬운 작품들도 있지만 대게는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서 어림잡아 이해하는데 작가들이 좀 더 대중성을 고려했으면 하는 분들이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미술관에 가면 아 이거! 하는 작품들도 있지만 안 그런 작품들이 더 많고, 이해했다고 하는 작품도 알고 보면 작가의 의도와 맞아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굳이 꼭 맞아떨어져야 예술경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서 모든 예술가가 그렇게 쉽게 갈 필요는 없다고 설파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술가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공유하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켄 로치의 영화를 보면 이런 아쉬움이 없다. 그의 안경은 현미경 같아 더 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