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중립국 Apr 23. 2021

오늘의 서술, #33 김기덕과 학폭

#33 김기덕과 학폭



 작년 말 영화감독 김기덕이 코로나로 세상을 떠났다. 애도하는 이들도 있었고, 잘 된 일이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고, 침묵으로 응하는 이들도 있었다. 독특한 시선과 정제되지 않은 문법으로 작품을 만들었기에 소싯적에는 찾아서 봤더랬다. “봄, 여름~”, “피에타”, “빈집” 등 수상도 했던 작품들도 괜찮지만, “수취인불명”이라는 영화를 가장 좋아했다. 지금은 그의 영화를 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본 작품이 피에타다. 추문 때문에 보이콧 한지 오래다.

 

 작가와 작품을 떼어놓고 볼 수 있을까? 꽤 오래된 논쟁인데,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김기덕의 영화는 주로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 천착한다. 예술이 매체에 따라 장르에 따라 다루는 것들이 상이하겠지만 영화는 주로 인간(의 삶)을 살피는 작업이라고 상정한다면 사람을 디테일하고 면밀하게 분석해야 할 테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이 폭력에 대해 정의한 말,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태도이다”를 보면 김기덕은 실패한 예술가가 아닐까? 현실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예술에서는 기막힌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의 영화에 매번 등장하는 폭력적인 장면들과 사람과 사람의 대결 양상은 그의 영화 제목처럼 “실제상황”이지 않았을까. 그의 예술기반은 희생자가 존재한다. 물론 첨예한 상상이나 깊은 관찰이 없진 않을 테다. 하지만 사람을 밟고 만든 작품이 가치가 있을까.

 

 고위 공직자는 인사청문회를 하는 등 검증절차를 거친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인물에게는 치밀한 잣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나쁜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게 된다. 대중은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다. 학폭을 해도 운동만 잘하면 그만이고, 투기를 해도 정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라면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해당하는 사안에만 벌 받으면 그만인 사회. 이미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나. 사기 공화국이라고 하는데, 잠깐 벌 받고 그보다 훨씬 큰 이득을 취한다.

 

 예술도 정치도 삶의 한 영역이다. 정치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삶의 조화를 추구한다면, 예술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삶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정치를 잘하는 정치인에게 보내는 지지와 매번 기막힌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에게 보내는 환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어떻게 보아 야한가에 대한 각자의 관점에 따라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를 달리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돈 내고 소비하는 상품이라고 해도 우리는 불매운동을 한다. 예술을 그보다 좀 더 가치 있는 재화라고 생각한다면, 창작자의 면면과 윤리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강제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수용하는 입장에서 벼르고 벼른다면 표현을 제한하는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뻔뻔하고 안면몰수인 사람들이 적어지고 양심이 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전 02화 오늘의 서술, #23 켄 로치의 미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