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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한 Sep 17. 2023

깔끔한데 촌스러운 남자와의 데이트

#3화. 소고기 효과



양복 입은 서태지 님을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사실 그분보다 1인분에 48,000리 소고기가 더 궁금했다.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는 곰장어, 주꾸미, 치킨, 족발 주로 이런 메뉴들을 먹었다.

종로에서 일했으니 전집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전을 주로 파는 전통주점에 안 파는 게 없다.

단골 전통주점에 가서 그날그날 먹고 싶은 메뉴만 바꿔서 먹으면 됐다. 




만나기로 한 주말이다.

그날 나는 뭘 입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가 입고 나온 옷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내가 그림만 조금 잘 그렸으면 사진처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정도다.

체크무늬 남방에 팥죽색 니트, 팔꿈치에 동그란 천이 덧대어진 군청색 고르뎅 마이, 어중간하게 내려 입은 베이지색 면바지


요즘 패션용어 '네이비 코듀로이 재킷'이라고 설명한다면

그 촌스러움을 담을 수 없다. 군청색 고르뎅 마이가 적절하다.


가까이 보면 촌스러움 속에 깨알 같이 신경 쓴 디테일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촌스럽다.


지난번 양복 입은 서태지가  더 나았다.


다행히 내가 식당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누가 볼까봐 둘러 들어갔다.



소고기 등장!

자태가 곱다.

지글지글 타닥타닥 구워지는 소리도 좋다.


우리 집은 가족이 다 함께 빙 둘러앉아 식사를  한 적이 몇 번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화목하지 않았다. 엄마는 고기 냄새도 싫어했다.

그래서 oo가든, oo 이런 고깃집에서 식사할 일이 없었던 거다.


그러다  커 친구들이랑 맵고, 짜고, 달고, 느끼한 음식만 먹고 다녔다. 

오래간만에 자극적인 양념이 필요 없는 재료 자체로 완벽한 소고기  맛을 느낄 기회인 거다.

그것도 남의 돈으로




이 남자 말이 참 많다.

나는 소고기가  맛있다.


냠냠냠,  아 그런 일을 하시는군요.

욤욤욤, 우와 그런 것도 있어요?

쩝쩝쩝, 저도 비슷한 거 같아요.


촌스러운 서태지 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소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고 고소했다는 기억

내가 먹고 싶은 만큼 또 시켜줬다는 기억

소고기를 배불리 먹고 깍두기 볶음밥을 디저트로 먹으며 다음 약속을 잡았던 기억만 난다.


고기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와서 생각했다.

'이 남자랑 만나면 소고기는 실컷 먹겠는데? 그래 뭐 옷 스타일이 촌스럽긴 하지만 깔끔하잖아.'
소고기 효과였는지 두 번째 만남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남편은 그날 내가 복스럽고 맛있게 먹어서 예뻐 보였다고 한다.





맘에 드는 이성이 있다면

남자는 여자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아보자

자는 남자가 열심히 돈 벌어서 사주는 밥을 맛있게 먹자


누구나 다 아는 공식

아주 평범한 공식 같지만


의외로 요즘 남자들은 만나는 여자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관심이 없다.

대부분 여자가 두루두루 좋아할 평범한 음식

남자랑 안 먹어도 될 음식을 골라서 장소를 정한다.


요즘 여자들도 밥을 맛있게 안 먹는다.

예쁘게 먹으려고 깨작거리기 일쑤다. 아니면 맛집에 너무 빠삭해서 웬만한 음식은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맛있다고 극찬하기 힘든 것도 이유겠다.


나는 그 여자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아는데?

나는 그 남자랑 밥 먹을 때 정말 맛있다고 잘 먹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곧 그 이성과 사귈 예정이거나 이미 사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날 에피소드는 소고기 못 얻어먹어서 환장한 여자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평소 나는 소개팅남이나 썸남에게 절대 얻어먹지 않았다.


상대방이 맘에 안들수록 돈을 냈다.

이 여자에게 밥을 사줬다는 작은 우월감 아니 으쓱함도 주기 싫었다.

그래서 계산서를 가져다주면 내 앞으로 당겨뒀다가 남자가 화장실 가는 틈을 타 계산을 하거나

내가 화장실 간다고 하고 계산을 다.


알아서 먼저 계산하는 센스 있는 여자로 오해해 간혹 호감을 사기도 있다.



내가 첫 만남에 돈을 안 내고 얻어먹어 보려고 하는 건

상대가 나에게 돈 쓰는 걸 아까워하는지 아닌지 보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돈을 쓴다는 건 그만큼 마음도 쓰고 있다는 거니까


여자를 만나는데 돈이 조금이라도 아깝다면

그 여자는 아니다.

남자를 만나는데 따박따박 더치페이를 원하고 여자가 센스 있게 계산하지 않는다고 눈치를 준다면

그 남자도 아니다.


돈을 잘 벌다가도 출산 때문에 여자의 경제적 능력이 제로가 될 수 있고 남자도 갑작스러운 구조조정으로 백수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부터 니 거 내 거가 명확하다면 연애는 쉽고 편할 수 있지만 그런 사람과 결혼은 힘들다.

결혼은 직급과 사내 규범을 토대로 서로를 평가하고 평가받는 사회생활이 아니다.  공평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Give&Take도 성립되지 않는다.

결혼 생활은 사랑하나로 다 견디고 이겨낸다는 말이 맞다.

두근거리는 사랑이 식었다면 부부간의 우정과 의리로 산다고 노부부들이 말하지 않나.

몇십 년 지켜나갈 끈끈한 우정이 더치페이와 눈치싸움으로 시작될 리 없다.


 



돈 아끼지 않고 소고기로 배를 그득하게 채워준

촌스러운 서태지 님에게 톡이 왔다.


서한 씨는 생일이 언제예요?
몇 시에 태어났어요?


나는 눈치 백 단이다. 

이 남자 사주를 볼 작정이다.

나랑 궁합을 볼 ?

그래 보자 봐!

사귀지도 않는데 상극이라고 하면 안 만나면 되지!


음.. 생일은 2월 11일이고,

태어난 시간은 잘 모르는데 한 물어봐야겠네요.


다음 데이트는 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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