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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한 Sep 22. 2023

궁합이 좋으면 결혼하고 싶어 질까?

#4화. 재물복 있는 여자


내가 일하던 빌딩에서 길하나 만 건너면 인사동이다.

인사동이 시작되는 길부터 낙원상가까지 열개가 넘는 점집이 한쪽 길가에 있다.

종로에서 5년 넘게 일했지만 사주 보러 갈 생각은 안 해봤다. 보일 때마다 '누가 가서 점을 보길래 에 저렇게 많은 점집이 있는 걸까' 했다.


그러던 내가

12월 겨울 멋 내다 얼어 죽기 좋은 옷차림으로 

촌스러운 서태지 님과 점을 보러 갔다.


들어가면서

'여기는 왜 비닐 천막일까'

'타로점집은 예쁜 조명에 의자깔끔한데 사주팔자 보는 집은 왜 이렇게 꾸질꾸질할까?' 생각했다.


역사와 전통의 상징 인사동이라 그랬나 

타로와는 다르게  사주를 봐 온 세월과 경력을 허름한 천막으로 표현한 거 같다


요즘은 인테리어를 잘해놓고 세련되게 꾸며놓은 사주카페도  .

하지만  당시

사주팔자를 보러 간 적이 없는 나는

남자 만나니까 별 걸 다하러 온다며 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했다.




궁합 보러 오셨어? 

생시 불러봐!


81년 5월 25일 O

84년 2월 11일 O


사주쟁이 아줌마가 듣고 쓱쓱 써 내려가는 펜만 쳐다보고 있었다. 꽤 긴 시간이었는데 서로 한마디 말없이 지켜본 것 같다. 뭐라고 하려나 지금 저 아줌마는 내 인생을 어떻게 풀어나가는 걸까 궁금했다.


자.. 그러면 남자분부터 풀어볼게요

목(나무)이 , 토(흙)도 좀 있고

물, 나무, 흙이 조화롭네

라며 평범하지만 좋은 이야기들을 해줬다.



여자분을 보자 보자

남자한테 없는 게 여자분한테 다 있었네

금도 많고 불이 3개네?

금이 하나만 더 있으면 재벌사준데 아깝다

그래도 뭐 재물복이 있어서 먹고 사는 데는 문제없겠네

돈 복이 들었어




아주 예전에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옆자리 직원이 사주를 봐준 게 기억이 났다

"나중에 돈 걱정 안 하고 살겠어요 "

하길래 프리랜서로 4개월마다 계약하며

근근이 벌어먹고 사는 내가 무슨 수로 돈걱정을 안 하며 살겠냐고 따졌더니

 "음... 그럼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걸 수도 있죠"

하길래 웃어넘긴 적이 있다.





궁합은 75점 정도네 하고 점쟁이 아줌마가 결론을 냈고

서태지 님이 돈을 내고 나왔다.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


궁합을 보고 딱히 서로에 대해 기억나는 건 없고 내가 돈걱정 안 하고 산다는 게 좋았다.

그리고 궁합은 어디 나쁘다고 하지 않았으니 그냥 심심풀이 이벤트로 지나가나 싶었다.


그런데 다음 만남부터 이 남자 이상하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본격적으로 한번 만나보자 느낌이다.


궁합본 이후에 만나서 영화를 보는데 내내 핸드폰만 붙잡고 있다.

옆자리에서 불빛이 계속 보이니 거슬린다.

영업직이라서 영화 보면서도 일을 하는 건가


우윙~(영화감상 중 진동모드) 카톡이 온다


저랑 진지하게 만나보지 않을래요? 저랑 같은 마음이면 손 잡아 주세요


옷도 촌스럽게 입고 사귀자는 말도 참 촌스럽게 한다.

영화 보는 내내 저 한 줄을 보내려고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한 거였다.


그렇다.

이 사람 내 사주가 너무 맘에 들었나 보다.

알고 보니 이 남자 집안은 사주를 믿는.

분명 천주교라고 했는데 으흠...


아들이 나이가 찼는데 여자친구도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 사주팔자를 보러 갔더니

"아들 걱정하지 마. 사주에 불 세 개 있는 여자 만나면 세 번 보고 결혼한다고 할 거야"

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동안 소개팅 할 때마다 불 세 개인 여자를 찾아 헤맸나 보. 

만나는 소개팅녀가 나처럼 생시를 알려줬을 리 없고

 세 개 있는 여자를 찾는 건 꿈속에 조상님이 나와 로또 번호 알려주는 거보다 더 힘들었을 거다.

그 나이까지 여자친구 없이 부모님 걱정시킬만하다. 


근데 나는 태어난 날짜며 시간이며 다 알려줘

같이 점도 러 가줘

침 불도 3개?! 재물복도 있어?!

이 여자다 싶었나 보다

나중에 들으니 이 여자가 내 사람이다 했단다


그때부터 나에 대한 아니 내 사주에 대한 확신으로

이 남자는 매일 나를 만나러 회사 앞, 집 앞으로 찾아왔다. 친구, 선배, 직장동료 할 것 없이 나와 함께 만났다.

'내가 운명이라고 믿는 이 사람이 당신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나요'라고 확인받고 싶은 사람처럼

3개월을 매일 만났다.


우리는 11월 29일 첫 소개팅을

12월 17 궁합을 보고 2월 23일에 결혼식장을 잡았다.


나도 이때는 뭐에 홀린 게 분명하다

엄마한테 살림하기 싫다, 결혼 안 하고 혼자 편하게 살고 싶다 그러더니 3개월 만에 날짜를 잡았다.

결혼은 뭐에 씌어서 하는 거라더니 딱 그거였다.


2023년 소개팅에서 며칠 몇 시에 태어났냐고 물으면

"제가 태어난 시간은 알아서 뭐 하시게요?"라고 했을 거 같다. 촌스러운 서태지 님은 요즘 MBTI 묻듯 내 생시를 묻고 나는 거기에 대답을 했다. 10년 전이라 가능했다.


결혼날짜는 3개월 만에 잡았는데

아주 성실한 회사원 이시라 바쁘지 않은 12월에 결혼을 해야 된단다.

2월에 날을 잡고 12월에 결혼식을 하자고?

10개월이나 남았는데 이 결혼 중간에 엎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는 10개월 동안 철저하고 치밀하게 결혼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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