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한 번 옮겨 강남으로 출퇴근할 때였다. 나는 광역버스를 타고 왕복 2시간 정도를 다녔는데, 종종 2층 버스를 이용했다. 2층의 의자들은 앞뒤 간격은 물론 옆자리와의 간격도 상당히 붙어있어서 두꺼운 겨울 패딩을 입어야 할 때면 옆 사람과 꼭 붙어 앉은 채 도로 위를 한참 동안 달려야 했다.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퇴근길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잠에 들었는데, 얼마 못 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불쾌함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과 함께 내리깐 눈을 천천히 떴을 땐, 내 옆에 앉은 남자가 자신의 롱패딩 아래로 내 허벅지를 만지고 있었다. 그냥 닿거나 스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쓰다듬고 있었다. 어쩌면 꽤 오래 만졌을지도 모르는 그 더러운 손을 쳐내며 소리 질렀다면 좋았겠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대신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남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러나 재빠르게 자기 무릎 위로 손을 옮겨갔다. 그 상태로 20분 정도를 더 달려 집까지 왔다. 불쾌했고, 짜증 났고, 더러웠다. 정류장에 내려 집까지 걸어오며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야지만 방금 버스에서의 일이 내 인생에서 없던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시절 자취를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거리가 꽤 가까워서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종종 놀러 오고는 했다. 하루는 꽤 오랜 시간 함께 어울렸던 동네 남사친이 술 한잔하자며 우리 집 근처로 찾아왔다. 주점들이 모여있는 골목에서 만났는데, 그 애는 이미 술을 좀 하고 온 상태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여자친구랑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속이 상해 나에게 상담을 좀 하고 싶어 왔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 애는 주점이 아닌 우리 집에서 술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 너무 피곤한데 밖에서 먹지 말고 편하게 네 자취방에서 먹자.”
“오늘은 다른 애들도 없고, 둘이는 좀 그래. 피곤하면 이만 돌아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럼 나 네 방에서 핸드폰 배터리만 충전하고 갈게. 배터리가 없어서 집 가는 길에 폰 꺼질 것 같아.”
“편의점에 충전 맡겨. 여기 편의점 충전돼.”
(그땐 편의점에 일회용 보조배터리라는 게 없었고, 돈을 내면 충전을 시켜주는 시스템이 있었다.)
남사친은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며 내 자취방에 가자고 했고, 나는 그 애의 손을 떼어내고 돌려세우며 버스를 타러 가자고 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중, 그 애의 주머니에서 ‘003’이라는 숫자가 적힌 작은 상자가 떨어졌다. 남사친은 그것을 급히 주워 다시 주머니에 넣었는데, 나는 그게 콘돔이라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나이였다. 저걸 챙겨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불순한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나는 우리가 꽤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그런 상대로 생각했다는 것에 배신감도 느꼈다. 심지어 단호하게 그 애를 돌려보내고 접속한 SNS에서는 그 애가 2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애의 여자친구에게 DM을 보내 이런 기막힌 상황에 대해 알릴까 고민하느라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물론 끝내 메세지는 보내지 못했다. 메세지를 전송하는 순간 그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 같아서.
여자인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면 한 번씩 꼭 등장하는 주제의 이야기이다. 누군가 이런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고 운을 떼면 다른 친구들은 “어? 나도 그런 적 있어.” 하며 공감한다. 여자로 살다 보면 한 번쯤 만나게 되는 그런 필연적인 불행인 걸까. 하지만 나는 그 대화에 공감하며 맞장구치지 않는다. 나도 겪어본 그 일들을 그저 없던 일들로 만들며, 저 멀리 과거의 큰 불행 또한 깊숙한 곳에 묻어둔다. 때론 그게 속 편하다. 오늘도 나는 태연한 척하며 사람들을, 그리고 나를 속인다.
(여자로 살다 보면 쉽게 만나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