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둠이 무서웠다. 어둠은 마치 늪과 같아서 한 번 발을 들이면 서서히 침몰하다가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밤이 무서웠다. 눈을 감는 것이 무서웠고 잠에 드는 것이 무서웠다. 방의 불을 아무리 환하게 켜둔다 한들 눈을 감으면 다시 어둠이 찾아오니 잠에 들 수 없었다. 사람들에 섞여 아무렇지 않은 척 낮을 보내고, 혼자 웅크린 채 다시 돌아온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결심하고 찾아간 곳은 해바라기센터였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의료, 수사, 심리치료 등의 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5년 전에도 이 센터를 통해서 증거를 확보하고 수사를 진행했었다. 후유증은 당시부터 있었지만 따로 심리치료를 받지는 않았다. 정신과에 다니는 건 나 정신에 문제 있다고, 나 아주 약한 인간이라고 공표하는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다고 말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 열다섯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스물의 나는 더 이상 괜찮다는 말에 숨고 싶지 않았다. 이제 진짜 괜찮아지고 싶었다.
센터에서 연결해 준 선생님은 새하얀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이런 할아버지가 나를 고쳐줄 수 있다고…?’라는 의심을 아주 잠시 품긴 했지만 딱히 불만은 없었다. 아니 불만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듯이 했던 나는 당장 수면제라도 받아 가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면 숨이 쉬어지지 않는 패닉 때문에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몇 층이 되었건 계단으로만 다녔다. 타이밍 나쁘게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심할 때는 블랙아웃까지 경험했다. 미디어에서 성폭력 관련 내용을 마주하면 사람들의 눈치부터 살폈다. 분명 저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3주에 한 번씩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상담과 약물치료, 인지행동치료 등을 병행했다. 그중에는 조용히 눈을 감는 명상 시간도 있었다. 누군가 함께 있어도 한참을 눈 감고 있는다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그리 반가운 치료는 아니었다. 슬슬 명상 시간마저 스트레스가 되어 병원에 가기 싫어질 때쯤, 전혀 예상치 못한 요소가 내 두려움을 뭉개버렸다. 선생님 테이블 위에 항상 놓여있던 롤케이크 한 조각. 명상 시간 중 선생님이 그 롤케이크 몰래 드시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환자에게 명상을 시켜 놓고 혼자 롤케이크를 먹는 의사라니… 돌팔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조금 어이없긴 하지만, 나는 그때 눈을 감은 채 웃음을 참느라 처음으로 어둠에 대한 공포를 잊었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거창하게 밝은 미래와 대단한 각오, 뭐 그런 걸 끄집어내야 하는 게 아니었던 거다. 가벼운 생각. 그저 내 상처를 잠시 잊게 해 줄 롤케이크 한 조각이 필요했던 거지. 그때 그 웃음은 마치 어둠 속에서 켜진 성냥 하나 같았다. 아주 작긴 해도 성냥 불빛이 켜지자 내 주위에 잔뜩 쌓여있던 양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초에 불을 밝혔다. 하나씩 하나씩, 아주 많이, 그리고 예쁘게. 그 후로 선생님과의 명상 시간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시간이 되었다. 한참 나중에는 양초에 불을 잔뜩 붙여놓고 아늑함에 깜빡 졸기까지 했다. 나도 몰래 졸긴 했는데 선생님이 눈치채셨을진 모르겠다.
이제 불안이 찾아올 때면 눈을 감고 일부러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은 잠시 두려움을 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최선을 다해 빛을 찾는다. 마침내 빛을 발견해 내면 두려움은 어둠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진다.
어둠이 겁나거든 꼭 눈을 감아보길 바란다. 그 안에는 반드시 당신의 빛이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