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시험을 보고 나서 첫 아르바이트로 새로 오픈하는 고급 중식당에서 서빙을 했었다. 그곳의 매니저는 당시에는 꽤 어른이라고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서른? 아니 스물일곱이나 여덟쯤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매니저가 내가 원서를 넣은 전공과목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며, 자신이 봤던 도움이 될만한 책을 선물해 주겠다고 했다. 마침 우리 고등학교가 본인 집과 가까우니 근처로 와서 받아가라고 했다. 단축 수업이 있던 날이라 점심 먹기 전에 학교를 마치고 들르기로 했다. 만나기로 했던 매니저집 근처 편의점으로 갔더니, 자기가 공부한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주고 싶은데 밖이 추우니 잠시 집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어른이라면 학생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 것이라고 단단히 착각했었다. 나는 그의 집으로 올라갔다. 보일러를 켜지 않아 바닥이 차가우니 침대에 걸터앉으라고 했고, 작은 접이식 테이블 위에 차려둔 오렌지 주스와 과자를 내게 권했다. 그러고는 몇 권 되어 보이지도 않는 서랍 위의 책들 중에서 내게 줄 책을 한참 동안 찾았다. 오렌지 주스와 과자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런데 아마 먹지 않았던 것 같다. 매니저가 책을 찾으면서 “여기는 신축 오피스텔이라 성매매하는 젊은 여자들이 많이 산다.”, “앞으로 단축 수업하고 심심하면 내 원룸에 와서 놀고 있어도 된다.”와 같은 듣기 거북한 말들을 해댔는데, 그때 이상함을 느끼고 속이 안 좋아졌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나가버리면 매니저가 괜히 기분 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가 들려주겠다던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를 얼마쯤 대충 듣고 나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깨를 밀치는 손에 내 상체가 침대 위로 완전히 눕혀졌다. “편하게 누워서 읽어.”라는 말과 함께.
나는 화들짝 놀라 바로 일어났고, 친구들과의 약속을 잊고 있었다며 허겁지겁 짐을 챙겨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얼마나 급했던지 잠바는 입지도 못하고 운동화는 구겨 신고 나왔던 기억이 선명하다. 복도식 오피스텔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혹시라도 매니저가 나를 다시 잡으러 쫓아 나오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해서 긴 복도와 엘리베이터 숫자를 번갈아가며 확인했다.
다행히 건물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때 내 손에는 입지 못한 외투와 휴대폰, 그리고 매니저가 준 책이 들려있었다. 그 사람이 준 책을 챙겨 나온 건, 정신없이 나오느라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내가 거기에 갔던 이유였기에 꼭 챙겨 나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럼 그 사람이 나를 강제로 눕혔던 조마조마한 일이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쁜 의도 없이 정말 편히 누워서 보라고 권했던 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알바를 같이 했던 여자친구들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알고 보니 비슷한 일을 당한, 당할뻔한 아이들도 몇 있었다. 그중 한 친구는 나를 따로 만나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또 매니저에게 나 대신 따져주기까지 했다. 정말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운 친구다. 그런데 나는 그때 알바를 그만두며 나를 위해 화내주었던 그 친구와 연락을 끊었다. 그냥 그러면 내 인생에서 아예 없던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로 살다 보면 쉽게 만나는 -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