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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Nov 20. 2024

40부터 일어나는 급격한 노화(2)

다시 일어날 용기


잠을 자는데 자꾸 가슴이 콕콕 쑤셨다. 생리 전이라 그런가 호르몬 변화가 몸으로 나타나나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통증 횟수가 잦아지고 잠을 이룰 수 없어 난생처음 유방외과를 찾았다. 다양한 검사 뒤 선생님께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잠을 못 자는 거 아니냐고 물으셨다. 층간 소음으로 집에 있기가 힘든 데다 큰 아이가 사춘기가 오는지 너무 힘들게 해서 스트레스가 많다 하시니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수면시간을 늘리라고 하신다. 큰 일 아닌데 안심하고 돌아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찾아온 극심한 통증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어 갔던 병원에서 작은 덩어리가 보인단다. 암도 아니고 다들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데 항생제로 크기를 줄여보자 하셨다. 약을 2주 정도 먹음 작아진 크기에 아무렇지 않다 일정기간이 지나면 또다시 통증이 왔고 약을 먹어야 했다. 그러기를 몇 달했을까 크기는 줄지 않고 커지며 몸 안에서 몸 밖으로 계속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얗고 커다란 띠처럼 가슴을 뒤덮은 염증 덩어리는 짜내는 수준에서 수술로 제거를 해야 하는 단계까지 와버렸다. 아이 둘도 자연분만 했는데 갑자기 수술이라니. 간단하지만 넓게 절개해서 염증을 일으키는 부위를 모두 제거하고 봉합해야 한단다. 정말 간단하게 끝나는 수술로 들렸고 금방 끝나는 일이라 생각했다. 수술을 안 해본 자의 어리석은 판단이 이다지도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이야.



아이들한테 하교 후 할 일만 당부하고 혼자 씩씩하게 수술을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마취가 잘 되지 않아 수십 번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며 수십 번 마취를 하며 겨우 끝낸 수술 후 가족들에게는 괜찮다고 했지만 통증은 말로 설명이 안되게 고통스러웠다. 겨우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누워서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모두 잠이 든 저녁시간, 갑자기 투투 툭 소리와 함께 수술한 부위 위아래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수건과 지혈도구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응급실로 향했다. 위아래로 몇 시간째 피가 새는데 급한 마음에도 공손이 물어봤건만 응급실 간호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순서를 기다리라 소리만 버럭 지른 채 피를 닦으라며 거즈만 잔뜩 주고 간다. 이게  피가 솟구치는 환자에서 병원에서 해주는 처치가 맞나 싶었지만 바보같이 겁이 나서 크게 소리도 못 내고 마음만 졸이면서 그저 멈추길 기다리며 간호사가 주고 간 거즈로 피만 닦아내고 기다려야 했다. 4시간 이상 줄줄 새던 피가 조금씩 양이 줄어들 무렵 뒤늦게 나타난 전공의가 대충 보다가 ”저희 병원서 수술하신 게 아니라 처치를 못해요. 수술하신 병원으로 다시 가세요 “ 하며 압박붕대를 둘러준다. 피가 스스로 굳으면서 출혈부위를 막고 있을니 이대로 다시 수술병원에 가야 한다고. 동트기 전 돌아온 집에 고요히 잘 자는 아이들에 감사하며 아이들을 평소처럼 등교시키고 남편에게 걱정 말라고 출근하라고 보내고서 혼자 터덜터덜 걸어 다시 수술했던 병원으로 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병원 전체가 들썩였다. 대표 의사는 소문처럼 거칠고 큰 목소리에 화가 난 표정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더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수술부위치료를 하고 10일 뒤 봉합을 다시 하자고 한다. 수술은하고 봉합을 하고 피가 솟구치고 수술부위를 열고 둔 것도 모자라 재 봉합을 나중에 한다니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시 문제가 생기지 않게 깨끗하게 지혈과 치료를 한 뒤 경과를 지켜보고 봉합을 다시 해야 한단다. 수술 상처를 열어둔 다음에 하는 재 봉합이 이렇게 끔찍한지 몰랐다. 바늘 한 땀 한 땀마다 비명이 나왔다. 수술부위가 극도로 예민해져서 봉합하는 시간 내내 혼자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모든 봉합과 수습 상황이 끝나고 ‘울면서 잘 참고 싶었는데 시끄럽게 해 드려 죄송하다’며 의료진께 수없이 미안함을 표현했다. 그저 내가 못 견디고 내가 병을 만든 것 같아 자책하며 울었고 ‘환자를 힘들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담당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선생님들과 서로 위로를 건네고 회복실로 이동했다. 혼자 링거를 맞으며 회복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고통과 서러움이 몰려왔다. 수술의 고통을 참아낸 것도 모자라 수술 봉합까지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수술부위가 아물어 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중 아침에 눈을 떠 거울을 보는데 한쪽 볼이 심하게 부풀어 있다. ‘어라 이게 뭐지?’ 통증도 없는데 입 안을 들춰보니 잇몸 위쪽 볼과 닿은 부분이 부풀어 있었다. 잇몸인지 볼인지 뭐가 문지인지 몰라 고민하다 아이들 등교하자마자 다니던 치과로 달려갔다. 한동안 아파 진료를 못했던 오랜만에 만난 의사선생은 날 보더니 한숨을 쉰다 “아이고 일단 누워봐요” 오랜 시간 동안 내 이를 진료해 준 의사선생은 20대부터 같은 일을 하던 연구원의 동생을 소개받아 비슷한 나이이기에 항상 친구처럼 친절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일단 약부터 먹고 고름을 가라앉히고 그 이후에 와서 치료해야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봄에 한 가슴 수술 이야기를 꺼냈다. “면역력에 문제 생겼나 보다. 지금은 보이는 부분이 이래서 치료가 금방 되는데 안 보이는 장기들에서 탈 나면 큰일 나요” 하면서 사진을 보여준다. “이거 보이죠? 동네 가서 링거 맞는데 알아보고 면역력 높이는 링거 꼭 맞고 먹는 것도 면역력 높이는 거 먹어야 돼요”





면역력이야기를 듣고 나서 철퇴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연이어 몸에 문제가 생기는 데 무작정 20대처럼 먹고 생활을 하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영양은 챙기지 않았고 목표만 보고 돌진했던 어리석음의 결과가 몸에 각종 병을 일으켰던 거다. 집으로 돌아와 병원을 수소문해 링거를 맞고 다이어트를 중단했다. 탄수화물이 비만의 원인이라 생각해서 몇 년간 탄수화물을 끊었는데 다시 먹기 시작했다. 노화가 시작되면 기본적인 탄수화물이 필요하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지하게 강행된 유지어터에게 천벌이 내려진 기분이었다. 노화와 끊임없는 몸이 지르는 비명들은 왜 이렇게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덮치는 건지 극한 서러움이 밀려왔다. 상대도 없는 하릴없는 원망만 해보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 사람들의 수술과 치료, 다양한 병에 시달리는 주변의 40대 지인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소년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른 흉내가 내고 싶었다. 자유로움 하나만 가져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못하는 거 안 되는 거 투성이에 책임 질 일만 계속 얹어졌다. 오히려 더 힘든 상황이 잦아져서 헤쳐나갈 힘마저 점점 바닥나는 것 같다. 막연히 40대가 되면 안정된 직장,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가족들과 편안한 집에서의 생활일 거라 생각했건만. 불안한 남편 직장과 더불어 경력단절이 점점 길어지는 나, 층간소음으로 편하게 머물지 못하는 집이라는 공간과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의 지속적인 마찰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수년간 온몸과 마음으로 투쟁해 봤지만 남는 건 내 정신 쇠약과 병든 몸뿐이다. 이렇게 40대가 흘러가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다시 딛고 일어설 용기가 절실해지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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