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빨리 무너질 줄이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자 늘 책과 함께하는 사람이며 궁금하면 책을 통해 먼저 습득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책으로도 고도로 발달된 검색으로도 알 수 없는 게 경험이다. 경험으로 얻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결과는 다른 무엇으로도 얻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가장 놀라웠고 예측할 수 없었던 경험한 충격적인 사건 첫 번째는 4시간만 자면서 울어재끼는 신생아였고(중2병 오고 있는 장남 이야기) 두 번째가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4로 바뀌는 순간 온몸의 노화가 급격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올 거면 하나씩 오던가 왜 여러 가지 노화가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몰려드는지 당황스러움이 분노로 바뀌어 갔다.
“왜 아직은 젊은 나이인데 이렇게 온몸에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 거야!!”
어릴 땐 눈을 뜨면 컴퓨터부터 켜고 하루를 시작했다. 컴퓨터와 한 몸이 되는 순간이 즐거웠다. 게임을 하느냐고? 게임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게임하고는 인연이 없다. 12살 처음 공부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빠져 시도 때도 없이 컴퓨터를 켜고 노래를 들으며 쪼물락 하다 보면 시간이 그야말로 순삭이 되는 현상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아이를 낳고 몸에 아이 둘을 부착하고 컴퓨터를 하는 건 상상도 못 한다. 핸드폰이라도 잠심 눈을 돌리면 난리가 나는 아이들 덕에 손과 눈이 아이들만을 향해있었다. 본인의 신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이 몸에서 잠시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1초라도 허투루 낭비할 새라 냉큼 책을 집어 들었다.
잠이 없는 탓에 새벽녘에 눈을 뜨면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책상에 앉아 책을 펴는 게 일상이 되고 있던 어느 날, 평소처럼 눈을 비비며 책을 펼쳤는데 ‘읭? 글씨가 잘 안 보인다!!’ 이게 무슨 일인지 깜짝 놀라 세수도 해보고 인공 눈물도 넣어보고 잠시 눈을 더 감고 있어도 봤다. 조금 덜 흐릿할 뿐이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전조증상도 없었는데 10년 전에 했던 라섹수술이 이제 와서 부작용을 보이는 건가? 다행히 20분 정도가 지나면서 서서히 시력이 돌아왔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 일어난 해프닝 이겠거니 했으나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똑같았다.
내 눈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싶어 마침 아이가 하는 드림렌즈 정기 검진차 들린 안과 선생님께 상황을 여쭈었다. 내 눈을 라섹 수술 해주셨던 원장님이고 아이들 눈도 꾸준히 봐주시기에 조심스레 물었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제 노안이 시작인 거예요. 아주 초기일 뿐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많이 심해지면 진료 오세요.” 난 충격을 받았는데 이제 시작이라니...
어릴 때 엄마는 두 딸의 삼단 같은 머리를 묶어 주며 아침 등교를 도와주셨다. 본인 출근 준비로도 바쁘시면서도 꼭 머리를 묶어주셨는데 항상 나에게 “너는 머리숱이 유난히 많아서 손에 다 잡기도 힘들다” 뻣뻣한 머리카락은 아버지의 사마귀를 묶는데도 가끔 활용이 되었다. 두툼한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 둥둥 매어두면 점점 떨어져 나간다는데 엄마나 동생은 머리카락이 가늘어 묶기 전에 끊어져 사용할 수가 없었다. 꽉 힘주어 묶어도 끊어지지 않던 굵은 머리카락이 어느 순간 가느라란 실보다 얇아졌다.
작았던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야 내 몸에 대해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여기저기 붙어져 늘어진 살들이 너무 보기 싫어고 늦은 나이에 낳은 아이들이기에 친구 엄마들보다 확 늙어 보이기 싫었다. 옷장 속에 처박혀있던 예쁜 옷들이 장롱에서 썩어가는 것도 보기 싫었다. 그렇게 6년 넘는 시간 동안 독하게 탄수화물을 끊고 만보, 이만보를 걸어 다니며 개인 pt도 받아보고 등산도 해보며 혹독한 다이어트를 했다. 돌아온 결과는 머리털이 숭덩숭덩 빠져버린 휑한 머리통이었다. 회사와 자는 시간 외엔 자신의 책상에 꼿꼿이 앉아 공부하는 남편을 지나다 머리통이 휑하다 놀렸더니 남편이 비웃으며 ‘넌 다른 거 같아?’ 머리가 많이 빠진다고 생각은 했지만 앞머리 중심으로 가로방향 가르마 중심으로 세로 방향 큰 도로가 즐비한 게 아닌가. 나 대머리 되는 거야?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내 몸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너무 오래 아팠고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던 큰 아이는 일명 ‘힙시트’로만 끝없는 울음이 달래졌다. 그런 아이를 2년이나 허리에 매달고 키웠더니 허리를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치료를 받아도 그때뿐이었다. 둘째를 낳고 했던 뼈 검사에서 30대였던 산모는 60대 뼈라는 진단을 받고 영양제부터 먹어야 한다는 경고를 들었다. 아이를 막 낳고 퇴원도 하기 전이었다. 알약이 큰 데다 맛도 이상해서 매번 삼킬 때마다 고역이었지만 걱정하는 가족과 사둔 영양제가 아까워 꾹 참고 먹었고 다 먹고 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비타민과 결별을 택했다. 도저히 못 먹겠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 몸은 계속 건강할 줄 았았다. 40대가 되어도.
아이 둘을 낳고 키우던 이전에 살던 작은 집에서는 어린 아가들을 먹이려고 상을 펴서 가지런히 아이들 밥상을 차려서 들고 이동을 해서 먹여야 했다. 식탁이 2인용이라 비좁기도 했고 유아 식탁까지 넣으면 협소한 공간에 제대로 부모가 앉아 먹이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활동량이 엄청난 아이들 덕분에 모든 집들이 그러하듯 바닥에는 매트가 빈틈없이 깔리고 아이들이 위험할만한 공간을 모두 아이들의 보호를 위해 설치해 둔 울타리를 설치했다. 부엌은 칼이나 깨질만한 그릇이 많기 때문에 막아두었다. 아이들 밥을 차려서 먹이기 위해 아이들이 있는 거실로 가기 위해 상을 들고 울타리를 넘어가던 순간 허리가 휘청이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순식간에 상은 다 엎어져버렸다. 아이들은 놀라고 난 속상하기보다 화가 났다. 내 허리가 아파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아이들 먹일 음식이 다 쏟아져서 다시 치우고 차리는 번거로움이 피곤한 컨디션에 더해지다 보니 화가 되어 분출되었던 거다
그러게 상을 뒤엎길 여러 번 하고 나서야 허리가 심하게 고장이 난 심각성에 대해 인지를 했었다. 물건을 들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맡기고 한 달이 넘는 치료를 받았고 겨우 회복되어 일상생활이 가능해진 허리로 돌아왔다. 단지 아이를 낳아서 길렀을 뿐인데 몸에서 이렇게 비명을 질러대며 문제가 생기다니 허무하고 속상했다.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대! 나 스스로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다가오는 것 같아 순간순간 공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