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원하는 교대원생]
[EP7. 전역, 취업, 그 중간 어디쯤의 교대원]
전역을 앞둬 본 누군가는 한 번쯤 이러한 고민에 동반된 감정에 빠져본 시기가 있을 것이다.
‘전역하면 뭐 하지?’
특히, ROTC 장교들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휴학 없는 대학 졸업 후, 다시는 학생이라는 울타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입대를 했고, 월 마다 정기적인 수입이 생겨 씀씀이는 늘어났는데 급여 생활에 적응됐을 즈음 다가오는 전역 일자로 인해, 당장 전역하면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이들이 내 주변에만 해도 꽤 많은 것 같았다.
나 또한 그랬다. [알짱알짱, ROTC 장교의 삶]의 한 에피소드에도 그러한 일화와 감정에 대해 썼던 적이 있다. 부대 생활에 적응하고, 소위 나름의 기준 안에서 ‘짬’좀 찼다고 생각되는 안락한 무렵에, 안락함을 누리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전역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불안함 속에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다가오는 전역, 아직 확정되지 않은 전역 이후의 삶과 거취의 문제는 내게 꽤나 스트레스를 주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 교육대학원의 생활이 걸려있었다. 군대와 다음 직업 사이의 중간 어디쯤이기도 했지만, 군 생활을 하던 대구에서 약 1년 정도 남은 교육대학원 생활을 유지해야 하기에 가족과 집이 있는 인천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부담감’과 그래도 깡 백수는 아니고 대학원생이라도 될 수 있다는 약간의 ‘안도감’, 그 중간 어디쯤이기도 했다.
나의 전역 예정일은 6월 30일이었다. 전역을 앞둔 그해 1월부터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한국실용글쓰기 자격시험, 공인어학성적, 각종 자격증, 자기소개서 몇 편ⵈ. 그 당시 나의 삶은, 군 생활과 병행하는 대학원 생활, 그리고 그 둘을 병행하는 취준이었다.
그렇게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고,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흐르지 않았던 국방부의 시계가, 요상하게 그 무렵부터는 빠르게 흘렀다. 아직 사회로 나아갈 준비가 안 됐는데, 계속 입고 싶지도 않았으면서도 막상 벗으려니 두려운 군복을 벗어야만 하는 때가 점점 다가왔다. 그렇게, 5월이 됐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영남일보 입사 지원을 했지만, 2차 시험에서 탈락하기도 해 낙심한 상태였다.
그제서야, ‘요즘 젊은 사람들 힘들다.’라는 세간의 말들이 현실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두려움과 낙심의 시기를 보낼 무렵, 지역 언론사 채용 공고가 마침 하나 더 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실패할 수 없었다. 내가 해보고 싶었던 ‘언론’분야 취직과 1년 정도 남은 대구에서의 교육대학원 생활을 병행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검토하여 보낸 1차 서류 합격 통보를 받고, 시험과 면접 일정이 잡혔다. 우리 부대가 진행해야 하는 동원훈련 날과 겹쳤다. 지휘관에게 욕 먹을 각오를 하고 해당 내용을 보고 드렸다. 휴가는 안 되지만, 다행히 지휘관께서 배려해주어 잠시 시험과 면접을 보고 올 수 있게 됐다. 단, 군복을 입고 가야 했다. 그 때의 상황은, 또 다른 연재의 기회가 있을 때 구체적으로 써보기로 한다.
그렇게 남은 전형을 마치고,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전역을 약 1달 반 정도 남긴 상태에서 다행히 최선의 길이 열렸다. 부랴부랴 경북대 근처에 원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방 컨디션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싼 것. 그리고 가능하면 사글세로 낼 수 있는 원룸이면 됐다. 전역 전 일주일 정도의 휴가를 출발하기 전 이사를 완료해야 했다. 그 해 6월 30일은 금요일이었다. 전역식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올라가, 모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마친 뒤, 그다음 날인 7월 3일부터 새로운 직장 본사가 있는 포항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쯤 와서 그 시기를 다시 되돌아보니, 부담감과 안도감 그 사이 어디 쯤에 있었을 것 같은 교육대학원은 그 둘의 사이가 아닌 지름길로 가는 이정표에 쓰여 있었던 것 같다.
군 생활 중간에 우연히 합격하여 병행하게 된 교육대학원이 있었기에 군 생활을 더 풍성히 버텨냈다. 군 생활 이후에 1년 가량 이어나가야 하는 교육대학원이 있었기에 잠시 고생하더라도 그곳에서 빠르게 취업하기 위해 집중하고 노력하게 됐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병행할 수 있었던 교육대학원이 있었기에 속된 말로 ‘짜치지’ 않았다. 교육대학원이 있었기에 근처에 구한 원룸에 살며 주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장교와 기자의 삶을 연결해 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며, 다시한번 교사로 전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고, 지금은 다시 고향인 인천으로 올라와 무사하게 안정적인 상태로 일 할 수 있게 해줬다.
지금 기록하는 이 시리즈의 제목을 [교대원하는 교대원생]로 정한 이유는 별 것 없지만, ‘교대(trade)’를 원하는 ‘교대원생(교육대학원 학생)’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군인에서 기자로의 직업 교대를 가능하게 해줬던 교대원 생활이었고, 기자에서 교사로 직업 교대를 가능하게 해줬던 교대원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 중 하나는 군 생활을 병행하며 교육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다음 화 예고) : EP8. 교생실습을 하는 장교 출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