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대포함) 태국 공장의 시급은 2300원이다
첫날에 본격적으로 회사를 소개받기 전에, HR담당자는 나의 월급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다. 엑셀 차트를 보면서 이야기해 줬는데 홍콩에서 온 인턴이 제일 많이 받는단다. 시급을 적어놓은 줄 알았는데 일급이었다. 시급인 줄 착각한 내 일급은 21000원. 태국 인턴들은 12000원을 받는다.
당연하지만 돈을 벌려고 태국에 온 게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돈을 벌 목적보다 돈을 쓸 목적이었다. 동남아에서 매일 헬스하고 마사지받으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데 방학을 노는 데에만 낭비하긴 싫었다. 외주나 프리랜서 일로 디지털 노마드로 살면 되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사실 나는 대학교 1학년때부터 디지털노마드였다. 안정적이게 프리랜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2학년 때부터는 한 학기에 2000만 원이 넘는 학비는 내가 부담했다.
그래서인지 이미 익숙한 프리랜서 일들은 성장하고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운다는 느낌이 없었다. 내가 이미 시스템화해놓은 일들은 아무리 돈이 벌리더라도 계속해봤자 성취감이 없다. 아직 스물둘밖에 안되었는데 팔팔하게 돌아가는 이 뇌를 최대한으로 써야 하지 않는가. 안정적으로 하던 일만 계속하기엔 세상엔 아직 내가 모르는 지식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요양도 할 겸, 새로운 경험도 하고 공부도 할 겸 태국을 선택했다. 월급은 아쉽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집도주고 밥도주고 기사님도 있는데 월급을 덜 받는다는 것 외에는 공주처럼 생활했다. 부족한 돈은 프리랜서 일을 계속하면 채워지는데 워커홀릭인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급 2300원을 받고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식비 또한 2300원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사귄 친구들과 매일 점심때마다 가는 식당은 메뉴 하나에 50밧에서 60밧 정도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메뉴인 pad krapow는 딱 2300원이다. 내 시급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루에 9번씩이나 먹을 수 있는데 얼마나 행복한가!
한 달에 55만 원이라는 월급도 내가 원하는 생활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한 달에 5만 원 정도의 헬스장 멤버십을 유지하고, 한 번 받을 때마다 12,000원이 드는 마사지도 여유롭게 받을 수 있다. 대충 계산해 봐도 한 달에 마사지는 20번이나 받을 수 있었다. 한 달에 무려 20시간의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데, 마사지를 10번 받을 때마다 타이 마사지 1시간 무료권이 적립된다고 하니 한 달에 22번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꼴이다.
내가 태국에 온 모든 이유를 충족시켰으니 이제 나는 이 회사에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워 나가고, 퇴근 후에는 대학원 준비에만 집중하면 된다. 역시 진정한 행복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느끼는 만족감과 그를 위한 여유에서 비롯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도 경제적 압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풍요다. 사람들은 종종 행복을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찾으려 한다. 누가 더 좋은 대학을 나왔고,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갔는지 끝없는 비교 속에서 상대적 행복만을 좇는다.
하지만 행복은 결코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 없기에 외부에서 인정과 성취감을 찾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만 많이 있다면 그렇게 비교하고 돈쓰며 살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데 말이지. 새로운 일을 하는것도 행복하고, 그림을 그리는것도 행복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행복하다. 그리고 이렇듯 모든 자연스러운 것들을 좋아하며 행복해하면 돈은 따라 온다.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통해 수많은 경험을 쌓아왔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은 아마 양육환경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쉽게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다. 누군가는 나처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선천적으로 배우는걸 좋아한다. 내가 이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이 나에게 여유를 상속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도 나의 자녀에게 여유를 상속할 수 있도록, 자녀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좋아할 수 있도록 키우려고 한다.
좋은 대학에서 데려온 인턴이라 그런지 다들, 특히 나를 데려온 매니저님이 (직급으로 따지면 부장님) 좋아했다. 정확히는 젊은이의 패기와 (부장님과 나는 44살 차이가 난다. 정년퇴직을 안 하셨다.) 공장에 도움이 될 나의 지식을 좋아하신 거다. 부장님은 나를 어딜 가든 항상 데리고 다녔다. 애완 인턴이 된 느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된 나는 부장님의 오랜 친구인 공장의 부장, 임원급 직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다들 이 공장에서만 40년을 일했다고 한다.
학벌이 좋으신 분들도 많았다. 옥스퍼드 학부생, 대학원생 출신 임원분도 계셨다. 자녀들은 싱가포르의 대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덕분에 대학원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옥스퍼드처럼 탑급 명문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은 좋은 대화거리였다. 일단 부장, 임원급 직원들은 대체로 홍콩 출신이라서, 내가 다니는 대학을 들었을 때 그 대학의 역사와 기숙사 위치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UC? Its on the mountain!"
나는 학교를 다닐 때도 신설 기숙사가 아닌 70년이 넘은 기숙사 출신이기 때문에 (College라 부른다) 내 기숙사도 좋은 대화거리가 되었다.
인턴을 그런 식사자리에 데려가는 건 웃기지만 최대한 많은 경험을 시켜주려고 하는 게 좋았다. 나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한 회사에 30년 이상을 다닌 사람들은 어떤 사고를 하는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영어와 광둥어를 섞어 말하고 한 번씩 태국어를 하기도 했다. 영어로 된 대화는 대체로 나에게 말을 거는 상황이었는데, 자신들끼리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길래 혼자 이렇게 태국에 왔을까에 대해 토론하다가 영어로 질문한 거였다.
아버지는 뭐하시노?
한국어로 의역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물론 저렇게 물어보신 건 아니고, 조심스럽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상관없다'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가 너를 지원해 주실 의향이 있는데 네가 혼자 하려고 하는 거냐, 아니면 혼자 해야 해서 혼자 하는 거냐'라고 물어보셨다. 전자라고 답했더니 첫째가 아니냐, 첫째일 것 같다. 첫째면 동생을 챙기느라 이렇게 독립적인 성격이 될 수가 있다. 등의 대화로 넘어갔다.
부장님의 친구분들과 밥을 먹고 집에 왔더니 세탁기가 고장 나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빨래들을 들고 빨래방으로 갔다. 내가 지내는 회사가 지원해 준 콘도는 대학가에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학생들이 많아 빨래방 등 자취를 위한 상업시설들이 많은 동네였다.
세탁기에 세제를 부었더니 작동하지 않았다. 이유를 몰라 헤매고 있는데 앉아서 빨래를 기다리던 한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세제를 그렇게 넣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 어쩌면 집에 있는 세탁기도 이것 때문에 고장 난 게 아닐까? 싶은 순간 여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비닐봉지로 물을 떠 와 가루세제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까지 써가면서 물을 튀겨 남아있는 가루세제를 모두 없앴다. 세탁기가 돌아가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수차례 한 후 빨래와 씨름하느라 쌓인 연락을 보고 있는데,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Where are you from?
한국이라고 답했더니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어려 보이는데 어디서 왔냐는 말이었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확실히 어린애들은 어려 보이나 보다, 생각했다. 오늘 회사에서 만난 현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동갑 여자애가 생각났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눈만 봐도 확실히 어려 보인다는 게 느껴져 괜히 동질감이 들었었다.
어려 보인다는 말에 능글맞게 웃으면서 몇 살인지 맞추어보라고 했다. 왜 왔냐는 질문에 회사원이라고, 여기 옆 공장에서 일한다고 말해 놔서 이미 성인인 건 알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니 갓 대학 졸업한 사회초년생이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었겠지.
여자는 내가 스물두 살인걸 바로 맞췄다. 여자는 넌지시 월급을 물어봤다. 회사 밖 사람이니까 이런 것도 물어볼 수 있구나 싶었다. 55만 원 (12000밧+식대)이라고 말하니 언제 출근하냐 물어봤다. 오전 7시 45분이라고 했다. 여자는 놀라며 언제 퇴근하냐, 나는 5시라고 답했다.
나는 그렇게 힘들게 못살겠어서 캐디하고 있어. 캐디 뭔지 알아?
여자는 36살, 캐디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지내는 곳인 시라차는 파타야라는 도시 바로 30분 거리에 있다. 네이버에 파타야를 검색하기만 해도 파타야 골프투어가 나오길래 골프가 유명한 지역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서, 캐디라는 직업에 딱히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처음 만나본 직업이라 흥미가 갔다. 술을 마시냐 물어봤다.
뜬금없이 여기서 술을 마시냐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오늘 부장님들과 저녁식사를 한 후 갔던 슈퍼마켓에 와인 판매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선배들과 와인 스터디를 하며 배운 프랑스 레드와인으로 시작으로 저번달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와인들 (소테른, 포트와인 같은 달달한 걸 좋아한다.)을 잔뜩 먹은 나는 한동안 와인에 꽂혀있었다. 포트와인을 사놓을 생각이었는데, 혼자 마셔도 되지만 누군가와 같이 마시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술을 마시냐 물어보았다.
여자는 술을 즐겨 마시진 않지만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마신다고 했다. 회사 밖에는 친구가 없던 나에게, 14살 차이 나는 술친구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