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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년생, 태국 소도시로 출근합니다

공장과 물고기

by 에밀리

22세 여대생이 태국 공장에 혼자 왔다. 긴 여행이라 생각하니 조금 막막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랜만의 혼자 생활에 설레기도 했다. 집에서부터 공항까지 바쁘게 움직이며 막상 실감이 나지 않던 출발은 비행기에 앉고 나서야 겨우 현실로 다가왔다. 일기장과 노트북이 든 가방을 품에 안고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내가 태국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 건가?’

IMG_5973.HEIC 공장으로 가는 길

인턴으로 태국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왜 하필 태국?”, “태국까지 가서 공장 일을 한다고?” 친구들의 의아함을 뒤로하고 나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어차피 여행도 좋고, 경험도 좋으니 뭐든 하면 좋겠지 싶었다. 공항에 착륙할 무렵엔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기다려졌다. 조금은 걱정되면서도 기대되는, 딱 그만큼의 설렘을 안고 태국 공장에 들어갔다.


22살 여대생이 태국 공장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궁금할 것이다. 지금부터 이 글에서는 태국 공장이 인턴인 나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공장 생활은 스타트업과 어떻게 달랐는지 적어보도록 하겠다.


한국 회사와 태국 공장 인턴십의 차이

태국 공장에서의 인턴 업무는 한국의 '기존 직원들이 하는 업무를 보조하는' 인턴십과는 많이 달랐다. 회사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직접 선정하고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프로젝트를 혼자 주도하면서도, 그 제안을 한 부서의 도움을 받았다. 결국 나는 태국 오피스 모든 부서의 고충을 직접 들어야만 했다.


내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선정하고 리서치, 실험, 제품 개발까지 진행하는 과정은 어찌 보면 스타트업보다 더 자유로웠다. 출근은 7시 45분, 퇴근은 5시, 점심은 12시 정각에 맞춰야 했다. 모든 것이 공장처럼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문화였지만 (실제로 공장이다!) 업무 자체만큼은 굉장히 자율적이었다. 이 특별한 자유는 오직 인턴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아무 계획 없이 살고, 할 일이 없으면 침대에 누워만 있던 나에게 이렇게 강제적인 일정은 오히려 좋았다. 게다가 매일 아침 나만을 위해 차를 끌고 오는 운전기사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반드시 정시에 나가야만 했다. 혼자였다면 조금씩 늦어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각각 다른 스타트업에서만 2년을 일했다. 그런데도 이 태국 공장은 스타트업보다 더 스타트업 같은 느낌이었다. 스타트업이 체계가 덜 잡혀 어쩔 수 없이 자유로운 곳이라면, 이곳은 완벽한 체계 속에서 인턴에게만 자율성을 허락하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이런 강제적인 루틴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내가 연구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연구하고 공부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회사가 인턴에게 원하는 것

그렇다면 이 회사가 인턴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인턴한테 뭘 기대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회사가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인력이 하루 한 번씩 인턴과 미팅을 하고, 하루 2시간씩 생산 현장을 직접 안내하며 기계를 설명할 이유가 없다. 출근 둘째 날, 나는 부장급 사람들이 8명 모여있는 곳에서 내 포트폴리오를 설명해 가며 발표하고, 그들 부서에서 겪고 있는 pain point (문제점) 들을 들었다. 그분들이 제시해 준 프로젝트 중 하나를 선택해 진행하는 게 인턴의 업무였다.


이곳 사람들은 내게 매우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을 요청했다.


"授人以鱼,不如授人以渔"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는 법을 가르쳐라

즉, "완성품만 주지 말고 완성품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서 회사에 새로운 인사이트를 가져다 달라"라는 것이다.


태국 공장에 1주일간 있으면서 '물고기 이야기'만 2시간을 들었다. 나는 프리랜서 웹 개발자인데, 프리랜서로 개발외주를 몇 번 받은 경험 덕분에 손이 빨라져 빠르게 MVP (최소 기능 제품 -Minimum Viable Product)를 구현할 수 있다. 그래서 회사가 제안한 여러 프로젝트들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고, 프로젝트 중 우연히 웹 개발 프로젝트가 있더라.


웹개발 프로젝트는 HR의 업무를 덜어주기 위해 AI인터뷰 플랫폼을 도입하는 것이었는데, 기존에 많이 만들어본 웹개발 프로세스라 AI 인터뷰 기능을 하루 만에 구현해 회사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부장님은 그것을 보시더니 최신 기술에 관심이 많은 또 다른 부장님을 데려왔고, 나는 두 사람 앞에서 약 30분 동안 데모를 했다. 부장님들은 내 발표를 보고 감탄하며 웹사이트 코드를 꼼꼼히 살펴봤다. 특히 AI 프롬프팅 부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시간 동안 이어진 미팅에서 부장님은 계속해서 '이 기술을 우리 개발팀이 쓰도록 만들어야 한다' 며 나의 AI 지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물어보았다. 그리고 "물고기를 주지 말고 낚시법을 알려달라"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칠판에 한자를 적으며 물고기와 낚시의 차이를 설명하는 모습이 중국어를 아는 사람만의 유머 같았지만, 나 역시 한자를 알기에 웃으며 공감했다. '물고기 사람'은 말이 안 되지만 '물고기를 잡는 사람'은 말이 된다고 하면서.


스크린샷 2025-06-15 오후 5.01.39.png 물고기를 잡는 사람


鱼 VS 渔

'물고기(鱼)'와 '낚시(渔)'는 한 끗 차이다. 물고기 앞에 '물 수(水)'만 붙이면 낚시가 된다. 중국인들은 이것으로 유명한 속담을 만들어 냈다. 사자성어로는 敎子採薪 (교차채신), 그러니까 부장님은 이 표현을 인용하며 "새로운 기술을 가져온 인턴이 그 지식을 회사에 공유하고 직원들에게 AI를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니 회사가 해외에서 인턴을 데려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회사 내에서 반복된 업무만 하다 보면 최신 기술과 트렌드를 접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좋은 학교에서 신선한 아이디어와 최신 기술을 가져올 수 있는 인턴을 데려오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젝트들을 제안받았고, 무엇을 선택했는지 이야기해 보겠다. 물론 회사 업무인 만큼 실제 내용을 각색하여 소개할 예정이다.



안녕하세요?


6월의 초여름, 이곳 태국은 무척 습하고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더운 공장 생산현장을 돌아다니며 하나씩 배워가며 보내는 나날들이 낯설지만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긴 글임에도 불구하고 하트와 공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글을 계속 써내려갈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앞으로 이어질 태국 공장 이야기들도 꾸준히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에밀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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