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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공장에서 공주가 되었습니다

전용 리무진과 집을 주는 태국 공장

by 에밀리

"Didn't your parents worry when you told them you'd be coming here?"

(여기 온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걱정 안 하시더나?)


언젠가 상사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음, 사실은 스물두 살 여자애가 한국인이 본인뿐인 태국 공장에 들어간다는 말에 아버지는 3일을 밤낮으로 걱정하셨다. 이 회사는 우리 학교(대학교)와 10년 이상 교류해 온 회사다, 채용담당자와 3달을 이메일로 연락하면서 지냈다 등 온갖 자료들을 보여드리며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는 믿지 않으셨다. (아마 그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이미 태국 범죄로 도배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더 현실적이었다.


"너 거기 가서 뭐 먹고살아? 밥은 나와?"

"거기 코로나 유행이라며, 마스크는 있나?"


하지만 취업사기 걱정이 무색하게 태국의 공장은 나를 무지 공주처럼 대했다.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공장으로 이동하는데, 오직 나만을 위해 공장의 리무진이 호텔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침을 아직 먹지 않아서 호텔 안에 있는 카페에서 크로와상을 사던 참이었는데, 예상 시간보다 일찍 차가 와 당황하며 크로와상을 데우지도 못하고 차에 올라탔다. 딱딱한 크로와상에서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회사차.HEIC 회사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무진을 타자 회사 로고가 붙여진 물을 받을 수 있었다.


받은 물.HEIC 회사 로고가 달린 물

회사 로고가 달린 물이라니. 이건 좀 새로웠다. 대기업도 물에 회사 로고는 안 박지 않나? 심지어 어디 유통하는 물도 아니고 내부적으로 마시는 용도인 물인 듯했다.


모든 경험이 럭셔리했다. 그리고 난 사실 이것에 어딘가 익숙함을 느꼈다. 중견~대기업급 공장이라 그런 걸까? 아니다. 대기업이라면 아무리 글로벌한 기업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더 편하면 편했지 이런 경험은 흔치 않을 거다. 이 공장이 이런 시스템 - 회사 전용 물과 리무진과 기사님 - 이 있는 이유는 단지 공장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내 주변에는 이상하리만치 ‘공장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겉으로 보이는 위엄, 폼, 체면. 할아버지만 봐도 40년 넘게 전용 기사를 옆에 붙여 회장용 벤츠를 타고 다니신다. 공장은 네트워킹이 많이 필요하고 접대가 많기 때문일까? '럭셔리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시스템이 굉장히 잘 되어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인턴이 누리게 해 준다니.


만약 정말로 이게 취업사기라면 정말 공을 많이 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공주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시원하게 만든 회사 물을 마시고 리무진을 타는 것 때문이 아니다. 이건 몇 시간 뒤의 일이지만 회사는 나에게 집을 줬다. 이것도 운이 좋긴 한데, 원래는 룸메이트가 있어야 하는 시스템인데 이번 연도 인턴이 나 하나뿐이란다. 발코니와 거실과 수영장이 있는 큰 콘도를 나 혼자 쓰게 되었다.


회사에 가는 것은 무려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왜 그렇게 담당자가 나와 한 달 동안 소통하며 픽업에 대해 강조했는지 알 것 같았다. 태워줄 만했다. (입국 바로 전날까지 픽업장소를 재확인했다) 아니, 태워주지 않았으면 퇴사했을 수도. 공장으로 가는 길은 정말 멀고 험했다.


외관.HEIC


역시, 내가 방금 한 분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공장의 외관은 압도적이었다. 건물 전면은 통유리로 마감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번쩍이는 회색빛의 회사 로고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리무진이 드나드는 입구는 가이드 세 명이 지키고 있었고,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도로 양옆에는 회사가 진출한 각국의 국기와 자사 로고 깃발이 일렬로 나부끼고 있었다.


오피스는 생각보단 그렇게 번쩍번쩍하지 않았다. 방마다 열명이 좀 넘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고 화려하기보다는 고풍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마중 나오더니 나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해 놓은 물을 내주고 내 짐을 옮겨주었다.


마시면서 온 물과 새로받은 시원한 물.HEIC 마시면서 온 물과 새로 받은 시원한 물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슬슬 궁금해질 것이다.

“그래서, 이 회사… 정체가 뭐지?”


내가 일하게 된 이 회사는 조리도구를 제조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생각보다 꽤 큰 규모의 공장이다. 프라이팬, 냄비, 스패튤라 같은 주방용품을 직접 만들고, 그걸 한국, 일본, 미국, 캐나다, 홍콩, 중국, 태국, 유럽(어느 나라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등지로 보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조리도구 중 1위 제품이라고 한다. 나도 이 회사의 브랜드를 홍콩에서부터 몇 번 봐 왔으니, 당신의 주방에도 어쩌면 이 회사가 만든 조리도구들이 올라가 있을지도 모른다.


공장만 있는 게 아니다. 자회사도 꽤 여러 개다. 알루미늄을 공정하는 공장, 와인을 만드는 공장, 마케팅 회사까지. 주방 한가운데서 시작된 사업이 꽤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간 느낌이다.

이 정도면 정말… 말까지 키우는 거 아니야?


문득 홍콩에 살던 시절, 자주 가던 경마장이 떠올랐다. 경마장은 참 묘한 곳이다. 계급이 눈에 확 보인다. 입장료 없이 들어가는 1층, 유료석인 2층 발코니, 그리고 VIP실과 말 오너만 들어갈 수 있는 전용 게이트까지. 돈의 위계를 물리적으로 볼 수 있는 구조다. 경마장이야말로 '다이아수저'들이 어떻게 사는지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경마장의 진풍경은 경주 전, 말들이 트랙을 천천히 한 바퀴 돌 때 펼쳐진다. 트랙 한가운데, 오너 가족들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아들, 손녀, 그 손녀의 손녀까지… 대를 이어 말과 함께 서 있는 장면은, 정말 말보다 그들이 더 주인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장면이 떠오르며, 나는 문득 이 공장의 주인 가족도 혹시 저렇지 않을까, 상상해 봤다. 정장을 입은 가족들이 공장 라인을 천천히 둘러보며, 신제품 프라이팬을 감상하고 있는 그런 장면.


상상에 잠겨 있던 그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미팅룸으로 불려 간 나는 누군가와 만났다. 지금까지 스타트업에서만 일했던 나는 이 회사의 인력 중 하나가 나만을 위해 시간을 뺀다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것도 그의 업무겠지,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Safety and security 담당자였던 그는 이 회사의 소개영상을 보여주고, 회사의 구조와 직급 체계, 공장의 위치, 공장 건물의 명칭들을 설명하며 시간을 보냈다. PPT가 있었는데 영어 PPT는 따로 준비를 안 해놓은 모양이었다. 당황하며 태국어로 된 ppt를 영어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인턴 하나 온다고 그 정도까진 일을 하지 않는구나, 어쩐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보이는 것 중에 가장 높은 빌딩이 네 숙소야"


브리핑이 끝나고 숙소로 데려다주는 길에 나를 고용해 준 상사가 말했다. 고층 빌딩이라고 엄청난 건 아니고, 30층정도 되는 높이의 콘도였는데 이 근방이 아무것도 없어서 내가 지내는 곳이 제일 높은 건물인 것이다...


내가 지낼 숙소까지는 네 명이 따라갔다.


"The driver will pick you up everyday. Seven forty-five."


매일 7시 45분마다 기사님이 와서 픽업을 해준다고 한다. 이것 또한 나 하나만을 위한 혜택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아예 대기업 통근버스처럼 사람들이 많이 타고 늦으면 그냥 가버리는 그런 시스템인 줄 알았는데 정말 나 한 명 만을 위해서 기사님이 회사 리무진을 끌고 출발하시는 거였다. (며칠 있어보니 흥미로운 점은 매일 회사 차가 바뀐다. 기사님이 가지고 나오고 싶은 차를 끌고 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숙소는 원룸이거나, 기숙사처럼 간단한 구조일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컸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부엌이었다. 딱 봐도 혼자 사는 사람을 위한 구조는 아니었고, 실제로 요리도 할 수 있을 만큼 냄비며 전자레인지며, 기본적인 건 다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발코니가 있었는데, 거기서 보는 해지는 풍경이 정말... 설명이 잘 안 되는 기분이었다. 하늘은 뻥 뚫려 있었고, 먼 곳까지 이어지는 낮은 건물들 사이로 주황빛 해가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IMG_6232.HEIC 발코니에서 찍은 일몰


드디어 태국에 온 게 조금은 실감이 났다.


이제 매일 마사지받고 헬스장 다니면서 살 수 있는 거구나, 나...




안녕하세요, 태국의 한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게 된 인턴 에밀리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에밀리라 불러요. 본명보다 에밀리라는 이름을 더 많이 씁니다ㅎㅎ)


이쯤 되면 무슨 엔지니어일지 궁금하시죠! 제가 어떤 일을 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지 천천히 연재해 보겠습니다.


브런치는 처음인데 잘 부탁드립니다! 역마살 잔뜩 낀 에밀리의 태국 공장 막내인턴 생존기 많이 기대해 주세요. 사촌동생, 아들딸 보는 느낌으로 저의 성장을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태국에서, 에밀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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