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천적으로 옷을 못입는다.
"회사는... 뭘 입고 가?"
태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 나는 옷가게 앞에서 30분째 망설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회사룩'이란 걸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회사는 뭘 입고 가는 곳일까?
제대로된 회사는 어떤 옷을 입고 가는지 모른다. 그야 지금까지 내가 다녔던 회사는 (총 3개를 다녔지만) 모두 스타트업이었고, 내가 디티(군대에서 입는 디지털티)를 입고 가든, 핑크색 츄리닝을 입고 가든, 바나나 티셔츠를 입고 가든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대체로는 회색 후드티를, 특별한 날에는 디티나 배트남에서 5천원 주고 산 바나나 셔츠를 입고 회사로 출근했다.
그야말로 패션 무정부 상태인 곳. 내가 어떤 편한 옷이든 다 입고 갈수있는 천국이었던 것이다. TPO란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건 하나도 걱정이 안되는데 (나는 뭘 하든 잘할거란 20대의 패기넘치는 자신감때문에) 가장 걱정되는건 업무도, 언어도 아닌 옷이었다.
웃기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나는 옷을 잘 못입었다.
이쁘게 못입는게 아니라 선천적으로 촉감에 굉장히 민감해서 택 하나만 달려도 하루종일 신경쓰이고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고등학생이 될때까지 청바지 하나도 못입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ADHD의 감각 과민반응이 한 몫 했다.
이런 사람이 대체 정장을 어떻게 매일 입겠는가.
하지만 어쨌든 사회생활이라는 걸 시작했으니, ‘회사에 입고 갈 옷’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옷가게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무난한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골랐다. 사실은 츄리닝 바지인데 얼핏 대충 보면 정장바지같아보이는 그런 바지였다.
편함과 체면 사이에서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평소엔 이 정도로 버티고, 발표할 일 있을 땐 미리 사둔 정장 입으면 되겠지.”
제대로된 정장은 발표나 네트워킹할 일이 많아서 진작에 사놨고, 평소에 입고다니는건 이정도면 되겠지라 생각하며 셔츠 세벌을 샀다.
그리고 드디어 첫 출근 날.
정성스럽게 다려놓은 셔츠를 입고, 바지가 구겨질까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평소엔 절대 안하는 화장까지 한 후 (그 더운 날씨에!)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나는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직원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파란색 회사 티셔츠, 검은색 정장바지, 그리고 안전화나 구두.
태국 공장은 유니폼이 있더라.
후에 안 사실인데, 인턴에게는 유니폼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정장셔츠의 까슬함에 치가 떨린 나는 제발 유니폼을 입으면 안되냐고 첫날부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렇게 상사는 나에게 특별 권한을 주었고 3일차 부터는 회사 유니폼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회사 유니폼은 직접 돈을주고 구할 필요가 없었다. 다행이도 입사 이틀차에 친구를 사귈 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승인이 나기도 전에 자신이 보급으로 받은 옷을 두벌이나 줬기 때문에...
이제는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대신 1분 만에 유니폼을 입고, 평화롭게 아침을 먹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패션 고민이라는 전쟁에서 드디어 승리를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