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풍경을 읽어드립니다.

매일 여행하는 마음으로

by 조은정

일생이 도박이었다.

나는 매일매일 담력을 걸어

나의 운명을 시험했다.

새벽 4시, 기차에서 내려 어둑한

브뤼셀 시내를 가로지를 때도,

Zollamt를 찾아 버스 종점에 내렸는데

주위를 보니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뿐일 때,

프라하 역 근처에서 길을 헤매는 바람에

죽을 만큼 뛰어 돌아가는 기차를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내가 승리했지만

직접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진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언제나 내가 하는 도박엔 딜러도 없었고

같이 떠드는 도박꾼들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긴장해서 꽉 쥔 종이 지도를

펴는 일뿐이었다.


언제부턴지 내 운명을

시험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냥 이대로,

편한 게 무지 좋았다.

담력으로 쌓은 단단했던 심장이

느슨하게 풀릴 때쯤

너는 내게 말했다.

"지금 모습이 딱 보기 좋다.

예전처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쉽게 쉽게 살자.

무사안일이라고 들어보았는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이렇게 평탄하게 살면

아무 걱정 없겠지."


네 말처럼 살기 시작하면서

잃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얻은 것도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예전에 얻었던 것들을

조금씩 쓰고 있었다.

이를테면 용기 같은 것들.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

그런 것들.


새벽 세시 반,

기차 환승 때문에

아무도 없는 겔젠키르헨에 내려

다음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릴 때

나는 속으로 계속 말했다.

제발 집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뮌스터로 가는 기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환승 때문에

뮐하임 중앙역에서 내려야 했는데

그전 역인 뮐하임 서역에서

내린 기억도 있다.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역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말했다.

제발, 오늘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그 속에 서려있던 간절함이

여태껏 자고 있던 나를

있는 힘껏 다시 깨웠다.


요즘 만사가 귀찮았다.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는데

문득 어떤 사진이 떠올랐다.


일 년 전, 어떤 사진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 위에

작은 불빛들이 모여

밤을 수놓는 사진.

특별하게 잘 찍은 사진도 아니고

그냥 누군가 무심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그쪽으로 쏠렸다.


나는 죽기 전에

이곳에 가 볼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글쎄, 힘들걸.

내가 있는 곳에서 그곳까지는 너무 멀다.

길 위에 지나가는 사람을 일일이

붙잡고 물어본다 해도

대부분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힘들다, 그렇게.


그래도 나는

다시 한번 그때의 간절함을 믿고

도박을 시작했다.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몇 번의 비행기와

몇 번의 버스와

몇 번의 택시를 탔다.

북위 78도,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 중에

가장 북쪽이라는 롱이어비엔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25분만 더 가면 티비에서나 보던

북극 다산기지에 갈 수 있다.

잠에서 깼다. 커튼을 여니

새벽 중턱인데도 대낮처럼 밝다.

머리맡에 둔 Mp3를 가져와

라디오를 맞춰봤다.

채널을 돌리다 꽤 마음에 드는 곡을 발견했다.

Royksopp의 Eple.

모든 게 꿈같았는데

노래를 듣는 순간

꿈이 아닌 것 같았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러도

해가 지지 않았다.

아마 내가 겨울에 왔더라면

하루 종일 어두운 밤만이 친히

나를 맞이했을 것이다.

내가 보았던 사진처럼

설원 위에 작은 불빛들만 보였으려나.

롱이어비엔에서의 개 썰매 투어 - 추웠지만 신났던 시간


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주위는 밝았지만 낮은 아니었다.

손목시계는 오후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속에서 뒤엉킨 모래바람을 맞아가며

계속 걸었다.

단순히 지도에 표시된 표지판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없는 길이

상상 이상으로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아무도 없음이 편안했다.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계단이 전부인 버스정류장,

높이 9.3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산타클로스 우체통,

철제로 만들어진 북극곰 모형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이들은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마치 제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선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표지판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북극곰 출몰 주의가 쓰여있는 표지판이었다.

추워서 손이 아리도록 시렸지만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사진 찍는 동안 다행히

북극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곳을 떠나기 전, 앞에 드넓게 펼쳐진 호수와

곰이 그려진 표지판을 번갈아보았다.

나는 표지판 옆에 마음속으로

오늘 내 운명의 승리 깃발을 꽂았다.

내일도 부디 승리하길 바라면서.


나는 그 후로도 여전히

나의 운명을 시험하고 있다.

살아있는 한, 나는 계속 그럴 것이다.

누구나 아는, 편한 길 위에서만

세상을 보지 말아야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한 장면을 위해,

일기장 귀퉁이를 접을 만큼

인상적인 오늘을 위해

살아야겠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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