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풍경을 읽어드립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스며들었던 날

by 조은정

"오늘 주제는 이번에 개봉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입니다."



교복을 입고 도착한 곳.
아무도 몰래 버스를 타고 처음으로 와본 곳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연습했다. 다행히 잘 도착했구나.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내 또래 애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어색해서 맨 뒷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은 어찌나 궁금한 게 많았던지
영화 구성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 않았고
나는 '뒷자리에 앉길 잘했어.'
그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강의가 끝나고 가방을 챙기는데
강사님이 친히 맨 뒷자리까지 오셨다.
"학생은 예고에 갈 건가요?"
낯을 퍽이나 가렸던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사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질문했다.
"학생은 영화가 왜 좋아요?"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 몰라요. 그냥 좋아요."
강사님은 알겠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도 또 봐요."
"네."


며칠 전에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야, 너 아직도 영화 쪼가리 같은 거
좋아하고 다니니?"
괜찮았다. 이제껏 괜찮다고 생각했다.
괜찮지 않았나. 다 잊은 것 아니었나.
아무것도 아닌 말이 불씨가 되어
내 마음에 툭하고 들어왔다.
여기 남은 건 서걱거리는 모래밖에 없어서
불이 붙지 않을 거라 믿었다.
역시 세상에 절대적인 믿음이란 건 없는 모양이다.
불이 붙었다. 그것도 심하게.
살아있었나 봐. 영화를 좋아했던 내 마음이.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그 때 그 시절이.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친구가 카운터에 가서 휴지 몇 십장을
가져온 것까지 기억난다.
대낮에 사람도 많은 카페에서.
주문한 자몽에이드의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본 지 20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그 수업을 들은 지 20년이 지났다.
8월이니까, 그냥 생각이 나서 그 영화를 다시 봤다.
꼬박 20년 만이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그날 그 수업을 들으러 갔던
내가 떠올랐다.
잘 도착할 수 있을까, 두근거리며 버스를 탔던 순간.
영어학원을 빠지고 가는 건데 괜찮겠지,
불안했던 마음들.
강의 내용을 한 자라도 빠뜨릴까 봐
노트에 빼곡히 적던 일.
강사님이 내게 와서 질문 주셨던 일까지.
모두 다 기억났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무렵에서야 깨달았다.
엔딩 시퀀스에서 초원사진관에 걸려있던 건
다림의 사진뿐만 아니라
20년 전 '내 마음'도 걸려있다는 걸.





나는 여전히 영화 쪼가리가 좋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 마음에 불씨가 다 없어진대도
날 여전히 울게 하고 웃게 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한다.
20년 후에도 아마 그곳엔
그날의 '내 마음'이 걸려있겠지.

오늘 자기 전 내 마음속 모래 위에
꾹꾹 눌러써야겠다.
내 인생에서 영원히 상영될
8월의 크리스마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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