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풍경을 읽어드립니다.

같이 음악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by 조은정

길을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말 걸기.

딱히 어렵지도, 그렇다고 무지 쉽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일.

하지만 초면인 사람에게 무턱대고 길을 묻거나

내 얘기를 한다는 건

공기놀이 다섯 번째 단에서

손등에 올린 공기를 다시

공중에 띄워 잡는 심정 비스무리하다.

최종적으로 공기가 잡힐까, 안 잡힐까.

이 사람이 지금 내가 하는 말에 대답을 할까, 안 할까.

물론 복잡한 생각 끝에도 결론은 뻔하다.

공기는 공중에 뜰 것이고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 것이다.




어쩌다 이른 새벽에 깨면

6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에 간다.

요즘은 날이 더워선지 달리는 사람도 몇 명 없다.

나는 언제나처럼 그네 의자에 앉아 강을 본다.

그네 의자는 다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이렇게 인적이 드문 시간대가 아니면

앉을 수가 없다.

그렇게 쉬었다 싶으면 일어나서

옆 동네 편의점까지 한참을 걷는다.

편의점에 다다르면 잠깐 서서

숨을 고르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게 요즘 내가 다니는 새벽 운동 코스다.

오늘도 역시 편의점 근처까지 가서

음악을 듣고 서 있었다.

두 곡쯤 들었을까.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옆에 앳된 외모의 여학생이 서있었다.

시계를 보고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저 혹시 음악 하시는 분이세요?"

나는 조금 황당했지만

웃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학생은 내가 지금 무슨 곡을

듣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선뜻 내가 듣고 있던 이어폰을 건네주었다.

학생은 거의 한 곡이 끝날 때쯤 내게 말했다.

"이 시간대에 여기 자주 오시죠?

편의점 일 끝내고 가는 길에

많이 봤어요."

내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학생은 말하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보는듯했다.

"매번 다이어리에 뭘 적으시길래

저는 작곡 같은 거 하시는 줄 알았어요.

보통 사람들이 음악 듣는 것 하곤 좀 달랐거든요.

하도 열심히 들으시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학생은 막힘없이 이야기를 해나갔다.

요즘 들어 되는 일 하나도 없다는 것과

아무도 내 편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오늘이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이라는 것.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나를 봤는데

며칠 만에 봐선지 반갑기도 하고

평소에 무슨 노래를 그렇게

열심히 듣는지도 궁금했고,

또 어떤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날이라서 말을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학생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낼 동안

나는 백사장에서 유리조각을 고르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줄 상대,

그러나 이야기를 듣되 그 이야기를

바로 지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날 있잖아요. 너무 힘들고 이불 안에서 막 울고 싶은 날이요. 혼자 구석에서 음악 들었으면 더 외로웠을 텐데. 들려주신 음악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학생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흡사 백사장에서 발견한 유리조각을

줍지 않고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사람을 위해 하려고 했던 일들이

도리어 내게 상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하고 조용히 핑계를 대며 발끝으로

모래를 모으는 일뿐이었다.

학생은 내가 들려주었던 음악 제목을

자신의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갔다.

목 인사를 하고 나는 두 발짝 걷다가

잠시 멈춰서 시계를 봤다.

정말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음악 네 곡이 흘렀을법한 시간이 지났다.

아마 공기놀이로 말한다면

한 40년쯤 흐르지 않았을까.

물론 다섯 번째 단에서

다섯 개의 돌을 매번 다 잡았다고 치면 말이다.


큰길로 나와 신호등 앞에서

초록불이 되길 기다렸다.

맞은편 사람들의 얼굴들을 찬찬히 보았다.

모두들 의욕 없는 눈을 하고

의미 없는 날들을 보내는 것처럼

흐릿한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초록불이 들어오자 그 사람들은

단 몇 초만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다. 나도 누군가에게

흐릿하게 사라져가는 사람이고

내게 말을 걸었던 학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같은 공간에서

같은 길을 걷고

매일 같은 바람을 맞고

같은 별을 보면서도

막상 서로가 흐려지는 것에는

무심하다.

이어폰에서 아까 그 곡이 흘러나왔다.

흐린 일상 속에

백 마디 말보다

한 곡의 음악이

선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처럼.


어떤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 곡일지라도

어떤 음악을 같이 들어주는 사람이

내 옆에 있다면

한 번쯤은 나도

그 사람에게 그 시간만큼은

선명해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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