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처럼
집에 거의 다 와갈 무렵,
엄마한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오는 길이면 계란 한 판 사 올래?"
나는 얼른 발길을 돌려 근처 건물
지하 식품관에 들어가 계란 한 판을 샀다.
그리고 목도 마른 핑계 삼아 아이스커피 한 잔도 샀다.
다 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한복 입은 몇몇 사람들과 더불어
예쁘게 화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한 명이 부케를 들고 있는 걸 보아
옆 호텔에서 방금 결혼식이 끝난 것 같았다.
부케에서 꽃향기가 폴폴 풍겨 나와서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모두들 즐거워 보이고 예뻐 보였던 시간.
나는 조금씩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구름다리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따라 노을까지 예쁘네', 하고
중간쯤 걸어왔을 때였다.
맞은편 종합병원 앞에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떤 분이 돌아가셨나 보다.
여기 앞을 지나다니면 늘 마주하는 풍경인데
오늘따라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누군가의 결혼식과 누군가의 장례식을
단 몇 분만에 번갈아 본 기분.
'내가 서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속으로 수십 번 넘게 물었던 질문에
마침표를 찍은 기분.
그러니까 나는 시작과 끝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딱 구름다리의 중간 어디쯤처럼.
갑자기 달리고 싶어서 마구 달렸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급한 일이 있는 줄 알았을 테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숨이 차오르고 정신이 없었지만
아까보다 바람을 가깝게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집에 도착해서야
이미 반쯤 녹아버린 아이스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쇼핑백을 열어보니 다행히 계란은 깨지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내 방에 들어와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러고 나서 며칠 전 그 애가 했던 질문과
내가 했던 답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애는 카페에 꽂힌 잡지책을 뽑아서
이리저리 펼쳐보다가 '청춘'이라는 단어를 보곤
내게 물었다.
"사람들이 청춘, 청춘 말하는데
청춘이 뭘까요? 정말."
항상 느끼지만, 그 애는
나의 방어벽이 허물어질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곧잘 한다.
나는 예전에 내가 썼던 희곡을 떠올리며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같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희곡 속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청춘이란 건요.
꺼질 듯 말 듯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만
바라보고 가는 것 같아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죠.
한 가지의 희망, 그리고
어떤 꿈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
가는 길 위에서 나는 자꾸 나약해지고, 주저하죠.
'너무 힘들어. 그냥 포기해버릴까.
내가 도착하기 전에 누가 불빛을 꺼버리면 어쩌지.
이렇게 가도 어차피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아.'
때때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괜한 의심과 후회를 하곤 해요.
하지만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불빛을 향해 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곳까지 가는 걸
포기할 수 없어요.
용기 있게 다시 나아가는 힘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꿋꿋이 계속 걸어갑니다.
그 속에서 나는 믿음을 가지고 견디는 법을 배워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진정되거든요.
그래요. 어쩌면 영원히 그 불빛에
닿지 못한다 하더라도 좋아요.
한순간이지만 어떤 꿈을 가져본 것만으로,
그 추억만으로도 남은 생을 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내 인생의 시작과 끝은 아무래도 알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확실한 것은
나는 중간 어디쯤에 서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계속 걸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청춘이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청춘일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작은 불빛이 보이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