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풍경을 읽어드립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곳, 어디든

by 조은정

재미가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엔 꼭 비행기를 접곤 했다.

날개 부분에는 책상 위에 있던 지구본을 돌리며

처음 보는 나라 이름을 하나둘 써놓았다.

비행기는 겨우 내 방 안에서 온 세계를 누볐지만

내 마음만은 그곳들을 다 다녀왔다.

사실 그곳이 어떤 나라인지,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이름만 쓰는데도 두근거렸다.

비행기가 멀리멀리 날았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면 다 가볼 수 있겠지.

서랍장 맨 마지막 서랍에서

부루마블을 꺼내 혼자 주사위를 던져보기도 했다.

이번 생이 마지막인 것처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얼른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를 떠올리니 혼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던 장면이 자꾸 눈에 스친다.

다들 분주한 공항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던 모습.

처음 보는 공중전화기 앞에 서서

한국에서 샀던 국제전화 카드 번호를

아무리 꾹꾹 눌러도 연결이 되지 않던 순간.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던 연결 게이트.

그래도 괜찮았다.

불현듯 어떤 위기가 닥쳐도

나는 어쨌든 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이 솟구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사히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타면서 깨달았다.

나는 어디서든, 어떻게 해서든 잘 살 수 있을 거란 걸.



오늘 한강을 걷는데 날리지 못한 비행기들이 생각났다학교가 끝나면 늘 그 애 집에서 비행기를 접었다.

"우리 다음엔 한강 가서

여태껏 접은 비행기들 모두 날리자"

호기롭게 한 약속은 보기 좋게 깨졌다.

다음이란 건 없었다. 몇 달 후 우리는

멀리 떨어진 지역의 학교로 배정받았고

비행기의 안부도, 너의 안부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때의 비행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젠 비행기를 접는 방법도 가물가물하다.

항상 책상 위에 있던 낡은 지구본과

서랍 속 너덜너덜해진 부루마블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여행 탐험 프로그램에 문득 멈춘다.

예전에 지구본에서 어렴풋 봤던 나라였다.

그리고 그뿐이다. 채널을 다시 돌린다.

'어떤 꿈이 있었던가'

부유하는 말풍선에 절로 머리를 가로젓게 된다.



요즘 들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마음 같아선 비행기 타고

얼른 날아가서 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매일같이 항공 예매 사이트를

들어가 보지만 또 그뿐이다.

고작 몇 시간 거리,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자꾸 주저한다.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나 많은데.



제일 먼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말도 안 되게 예쁜 색'이라고 표현한

바다를 가보고 싶고

뜨거운 태양에 반짝반짝 빛나는 모래사장에 앉아서

네가 좋아하는 와인도 한 잔 마시고 싶어.



일기를 쓰다 말고 아주 오랜만에 비행기를 접었다.

방법을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스르륵 나도 모르게 접고 있었다.

비행기 날개에는 네임펜으로

'지금 네가 있는 곳, 어디든'이라고 적었다.

날리지 못한 비행기들.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들.

시간을 예전 그 때로 돌릴 순 없지만

꿈은 어쩐지 돌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네가 보고 싶은 오늘 밤엔

꼭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p.s 새로 준비하는 에세이집에 실릴 이야기입니다:)

무심코 지나친 하루의 풍경들을 차곡차곡 담은 에세이예요.

출간 전까지는 조금씩 연재할 예정이니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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