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편지는 쌓이고, 그는 사라졌다
그분이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다리 쪽에 파스를 뿌렸다.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겨우 붙잡고 서서 상황을 살폈다. 심장이 요동쳤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얼마 안 돼 일어나 앉는 게 보였다.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고 다리를 살짝 절긴 했으나 웃고 있었다. 커튼 뒤를 떠나지 못하고 그분의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계속 쫓았다.
등굣길은 매일이 소풍 가는 길이었다. 국어 수업이 든 날은 그래서 설렜고, 국어 수업이 들지 않은 날은 근처 반 수업을 하느라 복도를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설렜다.
다만,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티 나지 않게 굴어야 했다. 나의 그 설렘을 친구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비밀은 들키지 않을 때 더 단단해지는 법이니까.
역할 놀이로 주변 세상을 흉내 내는 재미를 만끽하던 단계를 벗어나자, 갑자기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시끄럽게 했다. 왜 인간은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미움 속에서 아픔을 만드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아내야 세상을 더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졸업 직후 첫 발령을 받은 젊은 그 선생님은 나의 질문들에 정성껏 자신만의 답을 해주었고 여러 책들을 추천해 주었다. 어떤 질문들의 답은 너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는 동안 인간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고개 끄덕여지는 부분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더불어 내 인생의 설계도도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분은 때로 자신의 깊은 고뇌를 드러내기도 했다. 어쩌면 노년이 되어서도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문득 심란해져 버렸다. 어른이 되면 누구나 저절로 다 알게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다 큰 어른의 고뇌에 담긴 아픔을 위로해 줄 말을 찾기 위해, 가끔 뒤적여보던 대학생 언니의 책을 펼쳤다. 책 속 내용들을 바탕으로 문장을 만드느라 썼다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또 최선을 다한 것은 국어 공부였다. 그분은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교육 현장을 자주 비판하던 분이셨지만, 이상하게도 지필고사에서 100점을 받은 아이들을 꼭 호명하셨다. 호명되고 싶었다.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험 기간이 공고되고 나면 다른 교과 공부보다 항상 국어 공부를 먼저 시작했다.
얼마나 책장을 넘기고 또 넘기며 반복했던지 교과서가 낱장으로 떨어져 나갔고, 지우고 쓰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펜으로 긋고 또 긋는 통에 책이 부풀어 올라 두툼해졌다. 교과서와 공책이 마치 스캔한 듯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시험 문제를 다 풀고 검토까지 마치는 데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답은 전부 선명하게 보였다.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맞추며 웃어주면 나는 진정한 주인공이 되었다.
전생에 정말 나라라도 구한 것일까? 3학년 때도 국어 선생님은 그분이었다. 그걸 알았을 때,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오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열정이 과한 담임 선생님께서는 3월 첫날부터 당신이 정한 우리 반의 규칙 몇 가지를 발표했다. 그리고 규칙을 어길 시 매로 응징하겠다는 엄포를 놓으셨다.
점심시간에도 밥만 먹고 꼼짝없이 앉아서 공부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소화가 되지 않는 듯 속이 답답했다. 그래도 뭐, 괜찮다. 나의 국어 선생님이 계시니까.
국어 시간에 그분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문학에 담긴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때로 해주시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한바탕 웃으면 스트레스는 다 날아가 버렸다. 국어가 주당 단위 수가 가장 높아 거의 매일 시간표에 있는 과목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그날도 맑은 눈을 하고서 국어 선생님이 등장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 낯선 여자 선생님께서 앞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우리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 선생님을 빤히 쳐다봤다. 손에 들려 있는 국어책. 불안감이 밀려왔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제가 여러분들 국어를 가르칠 거예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같은 반이 된 혜인이가 급하게 소리쳤다.
“저희 국어 선생님은요?”
여자 선생님은 눈썹을 추켜올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씀 안 하고 가셨나 보네. 그 선생님은 군대 갔어요. ”
순간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군대? 왜? 내게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는데? 혹시 만우절 장난 같은 건가? 새로 오신 국어 선생님의 수업이 진행됐지만 우리들은 넋을 놓고 앉아 있었고,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혜인이의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우리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하시고 가버리냐. 정말 너무 하신 거 아냐?”
그분을 마음 깊이 흠모하던 몇몇 아이들이 하나, 둘 훌쩍훌쩍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머릿속이 마비되어 버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됐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 지어낸 말 같았다. 꿈이라면 빨리 깨고 싶었다.
그날 이후, 기다림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버렸다.